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49]

모든 2 2020. 6. 8. 18:26

주르바란「성 그레고리오」(부분)

 

 

그레고리오 1세 교황

 

  베드로는 제1대 교항이다. 베드로 이후 오늘날 까지 총 305명의 교황이 탄생했다. 그중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은 베네딕토와 함께 총 16명으로 역대 가장 많은 교황들이 선택한 이름이다. 그중 그레고리오 1세 교황(재위 590~604)은 '위대한"이란 칭호가 붙은 대교황이다. 그는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예로니모와 함께 가톨릭 교부의 4대 교부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를 받치는 가장 위대한 성인 중 한 분인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특히 교회미술에서 중요한 분으로 꼽힌다. 그는 6세기 말 교회에서의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신자들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시키려면 그림이 필요하다면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 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다."라고 했다. 고대 로마제국 멸망 후 중세 회화가 자리를 잡는데 큰 보호막이 되어 준 것이다.

 

  그레고리오 교황(540년 출생)은 이미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로마의 명문가 출신이다. 그는 법을 공부했고 그리스어에 능통한 청년으로 573년에 로마 시장이 되었다. 573년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교회에 봉헌했다. 자신의 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조했는가 하면,시칠리아에 5곳의 수도원을 지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사업을 했고,엄격한 베네딕토회 수도자의 길을 갔으며,그로 인해 만성위염을 앓았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578년 교황 베네딕토 1세의 권유에 따라 수도원을 나와 부제서품을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세의 후임이었던 펠라지우스 2세 교황 때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되어 동방교회의 총주교와 친분을 맺었고, 동방교회의 문제에 정통할 수 있었다.

 

  585년 로마로 귀국한 후 자신이 설립한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인 590년 로마시민과 원로원에 의해 추대되어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수도자 생활을 계속했고,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이라 칭하며 문란해진 교회를 바로잡고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시켰다.

 

  그의  업적 중 주교선출 규정을 제정한 일과 이민족의 개종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이유는 이민족의 침략이었는데 그는 로마를 침략한 롱고바르도족을 방어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다. 또한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40명의 선교사를 영국 캔터베리로 보내 현지인들을 개종시켰고, 영국교회와 로마교회가 우호적 관계를 갖는 데 이바지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특별히 성가에 관심을 가져 성가를 모으고 수정했는가 하면,직접 작곡을 하기도 하여 오늘날 「그레고리안 성가」라 불리는 무반주 라틴 성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854편의「서간문」을 남겼으며 「이탈리아 교부의 생애와 이적 및 영혼 불멸에 관한 대화」「사목지침」「그레고리오 전례서」를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604년 3월 12일 65세 되던 해에 로마에서 선종했다.

 

주르바란「성 그레고리오」1626~27,198×125cm,세비아,벨라 아르테스 미술관

 

  <성 그레고리오>는 짙은 어둠 속에서 그레고리오 교황만이 무대에서 조명을 받은 모습처럼 보인다. 흑백의 명암을 극단적으로 대비 시키는 회화기법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카라바조가 이기법을 창안한 이래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는데 주르바란도 이 기법에 따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