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2020년 5월 24일(가해)

모든 2 2020. 5. 25. 13:41

한진섭「엘리사벳 씨튼 성녀와 소녀」2013,화강석,성북동 씨튼 수녀원

 

 

 

+ 마태오 복음 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향기>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최동일 베드로 교구장 비서실장 겸 홍보국장-

 

  이번 주일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자 홍보 주일입니다.

  성자의 강생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셨다면,성자의 승천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모든 업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역사 안의 한 시점과 공간에서 이루신 당신의 구원 업적을 모든 시대,모든 장소로 확장하여 계속 이어 가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제는 당신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통해서 하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승천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이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승천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은 선교의 사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공동체이고,이 목적을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홍보 주일을 지내는 교회 안의 모든 홍보는 선교의 사명에 그 뿌리를 둡니다. 특별히 모든 시대,모든 장소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보다 효과적인 여러 방법들을 활용하는 것이 홍보의 핵심 과제입니다.

  이번 코로나19의 사태를 겪으면서 미디어를 홍보에 활용하는 것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일례로 우리 교구의 홍보국에서 그동안 운영해 왔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코로나19 이전까지는 750여 명에 불과했는데,코로나19로 인해 방송미사를 중계했던 두 달 사이에 2600여 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미디어를 통한 선교에 관심에 가지게 되었고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미디어의 발전이 우리의 삶(몸)과 정신을 분리시킬 위험도 존재합니다. 몸은 함께 있지 않으면서 미디어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디어를 활용하더라도 교회 안에서의 홍보는 언제나 선포가 되어야지 단순한 선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선전은 말,영상,글만으로도 할 수 있겠지만,선포는 삶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육과 영이 함께 부활하셨고,함께 승천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 선포 또한 육과 영이 늘 함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이를 홍보를 통해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서 더욱더 성찰이 필요합니다.

 

 

생육성(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의 순간들

 

  ②-2 생명을 세상에 낳다,출산하다<지난 편에 이어서>

  '세상에 생명을 낳는'(출산)행위가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그것을 표현해 내는 삶과 펼쳐짐은 봉헌된 독신생활을 하는 사람들,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유비(類比)적으로 포함할 수 있다. 곧 시대의 정신과 자유를 낳는 산파로서 생명에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교수와 교사,예술가와 연구자(과학/공학자)를 비롯한,봉헌생활자와 성직자들의 영적 모성과 부성을 포함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자신의 활동으로,그리고 그 활동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사실에서 '생명의 전파자'들이다.

  이때 생명이란 육체적인 생명(bios)만이 아니라,모든 생명(zoe)을 말한다. 이 생명은 진정한 탄생과 재생으로 이끌며,사람들이 활동하고,존재하는 방식을 자신이 헌신하는 이들에게 봉사하고 전달함으로써 창조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킨다. 여기서 나이나,성별,직업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직업이나,능력으로 사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타인의 행복,타인의 생명과 삶에 대한 모든 것을 실현시키는,직업을 살고,능력을 펼치고 있다. 또한 생물학자인 차원에서 오는 여러 제약들은 '한계'가 아니라 '생명의 토대'로써 정신적,문화적인 차원에서는 보다 많은 것이 실현되고 번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신덕인 '사랑'(애덕)의 차원에서,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모든 차원을 변화시키는 중재와 은총을 통해 '영원한 생명보다 덜하지 않은 생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써,그리고 전달함으로써 우리를 '보다 더 먼'곳으로 이끈다. 인간은 단순히 '생명의 소유자나 조작자'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명백하게 '생명의 봉사자'이며,그 스스로 '전달자'로 살아가고 있다.

 

③ 생명을 돌보다

  생육성은 생명을 '열망하고''낳은'후에,'돌보는 것'이다. 가령 유아세례에서 유아는 부모의 특별한 '소유'에서 곧바로 벗어난다. 부모와 같이, 부모와 동일한 신분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인 아이는 인류의 형제관계를 미리 앞당기는 교회의 넓은 관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이 형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들(생명)을 '돌보는'일이다.

  최근 기후환경에 대한 근심은 살아 있는 것,모든 생명의 조건을 돌보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평화,정의,그리고 생태계 보전을 위한 돌봄의 필요성을 신적 동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이름으로,이 생명 안에서 그리고 이 생명을 위하여 개개인은 유일하며, 모든 사람은 서로 결속되어 있다.'

  사실 '돌보다(care)'라는 개념은 단순히 '건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이 아닌,사람과 생명을 돌보는 것이다. 바로 생육성의 과정에서 생명을 '낳은'다음에는,그 생명에 '깨어 주의를 기울이고', 연약한 조건 아래서 그를 '보호하며',건강과 안전을 위한 기본적 필요들을 '보장하고',또한 '교육하며', '함께 살아감에 필요한 소질을 전수하는'것도 포함한다.

  오늘날 코로나19 사태 가운데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자신의 안위와 공동체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이르는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야 한다. 생명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이제는 변화해야 하며,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돌봄의 열망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을 돌봄'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생명의 긴 숨결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행위를 요구하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준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

이제 엉터리들에게

지지 않겠습니다.

거짓의 혀에

속지 않겠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