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20년 주보

부활 제5주일 2020년 5월 10일(가해)

모든 2 2020. 5. 10. 21:00

 

 도메니코 베카푸미「오상을 받는 성녀 가타리나」

1513~15,시에나,국립박물관

 

 

  +  요한 복음 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쳐할 곳이 많다.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다시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말씀의 향기>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김은석 요셉 대전성모병원 원목실장-

 

  제가 길눈이 어두운 것을 아는 동기들은 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갈 때면 꼭 한마디씩 거듭니다. "넌 내비게이션이 없었으면 운전 못했을 거야."

  그렇습니다. 저는 길치입니다. 여러 번 갔었던 길도 잃어버리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내비게이션을 켜 놓고도 길을 잘 못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갔던 길을 갈 때에도, 지름길로 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내비게이션의 말을 아주 잘 들으려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내비게이션이 가고 싶어 하는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볼 때마다 세상사의 많은 변화와 어려움으로 가야할 곳이 어딘지, 어떤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인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에 자주 빠지게 됩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산란함에 빠질수도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들은 대개 삶의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다른 이들에게 조언이나 삶의 지혜를 청합니다.

  '아~ 그건 내 경험으론 이렇게 해야 해. 이렇게 했더니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물론 삶의 풍파를 경험한 인생의 선배들과 지혜로운 이들의 조언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다른 이들의 경험과 성공담을 좇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삶의 가장 첫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이들입니다. 바로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가장 좋은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삶의 여러 난관들과 상황들 안에서 그 앞에 나아가 묻고,기도하고, 청할 예수님께서 계셔서 다행입니다.  

  마음이 산란해져 있는 우리들 앞에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시고 그 길로 이끌어 주실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계십니다.

 

  2000년이 넘게 성체의 형상으로 그 좁은 감실에서 우리를 만나고자 기다리시는 주님,

  미사성제 안에서 매번 사제의 축성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이 길을 걸어 주시는 주님.

  성경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생명의 말씀으로써 우리를 이끌어 주시려는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한국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57. 삼우미사는 유교 관습입니까?

 

"성찬례를 통하여 신자 공동체 특히 죽은 이의 가족은,죽은 이가 한 지체로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통공을 이룸으로써, 또 죽은 이를 위하여 죽은 이와 함께 기도함으로써,'주님 안에서 잠든'이와 친교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89항)

 

  유교의 예식에는 초우(初虞),재우(再虞),삼우(三虞) 등 우제(虞祭)의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라의 유명한 주석가인 정현(鄭玄,127-200년)은 삼우를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우(虞)는 상제(喪祭)의 명칭이다. 우는 '안정' [安] 시키는 것이다. 뼈와 살이 땅으로 돌아가니 정기(精氣)가 갈 곳이 없게 되어 효자는 그것이 방황할까 염려한다. 이에 세 번 제사를 드려 안정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장례를 치르고 이틀 뒤 봉헌하는 삼우 미사는 유교의 예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상장예식』에서는 삼우를 고인이 아니라 유가족을 안정시키는 시간으로 해석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세상을 떠난 이를 생각하여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사별의 아픔을 달래고 희망을 북돋우는 때이다."

 

58. 가톨릭 신자는 관혼상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또는 민족들의 고유의례와 문화에 심겨 있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 없어지지 않도록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치유되고 승화되고 완성되게 한다(선교 교령9항).

 

  관혼상제란 정해진 나이가 되면 어른이 되었다는 의미로 머리에 관을 씌워 주는 예식인 관(冠),남녀의 혼인 예식인 혼(婚),사람이 죽었을 때 장사를 지내는 예식인 상(喪),돌아가신 분을 기억하여 올리는 예식인 제(祭)등 네가지 예식을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관례보다 성인식이라 하여 그에 맞갖은 선물을 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혼례와 상례 그리고 전례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과 윤리생활에 관련된 유교의 가르침 안에서 가톨릭 신자는 하느님께서 뿌려 놓으신 복음의 씨앗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이를 고양시키는 것이 가톨릭 신자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의무가 신앙을 지킨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유례없는 사순 시기와 부활을 보내면서 교우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어도 봉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바꿔 말하면 교우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한결같아야 하지만 아직 부족한 탓인지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려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임신부님과 두 분 수녀님과 정해진 시간에 미사를 봉헌하긴 했지만,매일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되자 강론 준비를 하지 않게 되고 매일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데 소홀해지게 되었습니다. 미사전에 고해성사를 드리러 일찍 나가지 않아도 되자 그 시간에 고해소에서 틈틈이 읽던 영적독서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의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이 다 하기 싫은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쁘게 의무를 다하는 경우도 물론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의무는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를 옭아매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의무가 사라지자, 너무나도 자유롭고 편할 것만 같았는데 실제로는 무방비하게 위험에 노출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무라고 불리는 것들이 저를 옭아매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들이 저를 지켜주고 잡아주던 안전벨트와도 같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운전자는 운전을 하는 동안,안전벨트를 맴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안전벨트는 운전자를 시트에 구속함으로써 동시에 운전자의 안전을 보장해 줍니다. 만일 이 구속이 싫어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다면 안전벨트는 더 이상 운전자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2015년에 개봉한 미국영화 킹스맨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Manners maketh man." 우리말로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로 번역했더군요.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지내며 깨달은 것은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의무가 신앙을 지킨다. 이제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어 교우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제게 주어진 의무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재선 세례자요한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주님의 사랑

환히도 환하게도

예쁜 꽃으로 피었습니다.

 

내 영혼의 주름 위에

환히도 피었습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