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23주일 2019년 9월 8일(다해)

모든 2 2019. 9. 8. 21:00

 

 

 

 

 

 

안토넬로 다 메시나「성 세바스티아노」

1478-79,171×88.5cm,드레스덴,국립고미술관

 

 

 

  +루카 복음 14,25-33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말씀의 향기>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이유   - 임승옥 요한금구 천안용곡동 주임 -

 

  인간의 본성 중 하나는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과 마음을 희망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유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또는 조직에서 간섭받지 않는 삶의 모습,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세상 안에 존재하는 '나'로서가 아닌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나'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는 역설적으로 어딘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 예수님께 온전하게 속해 있을 때 자유는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은 부모님과 아내와 자녀, 형제자매, 자신까지 미워해야만 당신의 제자 즉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말씀의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을 보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말씀이 "더  사랑한다면"으로 바뀌어집니다. 즉 누구라도 자신의 부모, 형제, 자매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즉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의 '사랑'과 '자유'의 모습은 '너'와 '우리'만을 위한 모습과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과 마음이 아닌 세상을 미워해야 하는, 세상을 덜 사랑하는 즉 당신만을 향한 모습과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이 계명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바로 이 계명이 우리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실천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말씀은 세상 것의 포기와 주님을 향한 온전한 의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욕심, 단죄, 판단, 미움,집착 등 세상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얽매임으로써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얻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이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

 

28.  돌아가신 분의 묘소를 어디에 써야 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당신 은총의 자녀를 바쳐 드리고,영광 중에 다시 살아날 육체의 씨앗을, 희망을 가지고 땅에 묻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1683항)

 

  겨울에 찬바람 [風]을 막고 농사에 필요한 물[水]을 얻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땅을 살피는(地理)일이 풍수지리입니다.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발전한 풍수지리설은 자연환경을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결시키며 지리조건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합니다. 살기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살아있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터인 양택(陽宅)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매장하는 묏자리인 음택(陰宅)과도 관련됩니다.

  우리 민족 안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풍수지리가 유교의 효사상과 만나면서 돌아가신 조상을 편안한 자리에 모시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민간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좋은 묏자리를 확보하려고 가문 사이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명당에 대한 집착이 컸습니다.

  조상의 묏자리를 중시하는 태도는 조상을 편한한 곳에 모시려는 효성에서 비롯된 우리 고유의 종교적 심성입니다. 그렇지만 후손의 길흉화복 때문에 명당에 집착하는 자세는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의 본뜻을 흐리고, 후손의 현세적 욕심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29.  이웃이 가져다준 고사떡을 먹어도 됩니까?

 

"교회는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언하는...

모든 자녀에게 권고한다"(비 그리스도교선언2항).

 

 인간 신앙에 따라 지내는 고사(告祀)는 집안의 안녕을 위하여 집안의 여러 신령에게 올리는 의례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와 달린 민간 신앙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다스리고자 삶의 구체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여러신령에게 정성을 표시합니다.

 고사는 일반적으로 집안 단위로 지내며, 중요한 신령인 지신(地神,터줏대감),조왕신(조王神,부엌 신)에게 배례와 축원을 하고, 칠성신(七星神),측신(側神,뒷간 신),마당신, 문신(門神,수문장대감)등에는 제물만 놓아둡니다.

 고사떡은 해당 신령에게 바쳐진 제물이므로 그 떡을 나누어 먹는 행위가 종교적 성격을 지니는 것처럼 비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이웃과 친교를 위하여 고사떡을 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것이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믿음에 걸림돌이 될 경우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다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먹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1코린8,8)라고 가르칩니다.

 

 

 

한반도 평화의 길, 기도하며 함께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명절에는 온가족이 함께 모여 정답게 이야기도 나누고, 못다한 정을 나눕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은 가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명절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 중에 하나는 정치 이야기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세대 간에 삶의 경험과 정치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북정책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난해 남북대화가 다시 시작될 때, 한 북한 전문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남과 북이 평화롧게 살아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북의 분단으로 우리가 겪어 왔던 많은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늘 분단체제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치는 함께 토론하고, 합의하고, 더 좋은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틀렸음을 강요받아 왔습니다.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가르치고 교정하려고 했습니다. 정치가 심한 갈등을 겪고, 정치 이야기까지 피하게 되는 현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커다란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분단체제가 낳은 우리의 아픔을 뿐입니다.

 

  이번 명절에는 따뜻하게 정을 나누면서 정치적으로도 서로 화해하는 명절로 만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박재준 토마 신부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

 

 

 

 

 

 

 

 

 

 

 

내가 먼저

한발 다가서면

잘 들리고

잘 보이는 것을

 

왜 그리

멀리만 있었는가.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