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성모영보」1472-75,패널에 템페라와 유채,98×217cm,피렌체,우피치 미술관
+ 루카 복음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의 향기>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강철민 아우구스티노 버드내 주임-
어릴 적 살았던 집이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에 옥상에 올라가 보면 동네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머리 복잡할 때면 옥상에 올라가서 동네를 바라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지는 힐링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동네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볼 때마다 늘어나는 지붕 위의 빨간 십자가였습니다. 30년도 더 지난 과거의 기억이지만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십자가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순교 성인들이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다른 대륙이나 나라와는 달리 선교사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선교사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알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100년 가까운 박해의 시기 동안 만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 정치적 목적의 희생양으로, 국가의 근본 질서를 해치는 사악한 무리로 둔갑되어 척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 집에 살던 가족들에게, 가까운 친지들에게 혹은 한평생 함께 살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갖가지 오해와 핍박, 수모를 당하는 것은 기본이고 국가 차원의 수십 번의 크고 작은 박해에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신앙을 버리지는 않습니다.(요즘 초등부 주보 '하느님 사랑'과 중고등부 주보'아뉴스'에 연재되는 신비한 순교성인 사전을 통해 우리성인들 한 명 한명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도 지켜낸 신앙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이하거나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와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요즘 방송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느낌적인 느낌'이나 '기분'탓일까요? 솔직히 지금의 우리가 그들보다 더 많은 성경과 교리지식을 가졌고 더 많은 미사참례와 영성체를 했으며 더 많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땅을 밟아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더 많은 것을 했음에도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그것은 주님께 대한 간절함과 열정입니다. 그들은 평생 한번의 미사와 한번의 영성체, 한번의 고해성사에, 그리고 한번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그 순간을 너무나 기다렸고 영광스러워했습니다. 그 간절함은 뜨거운 열정 즉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들의 이 불타오르는 사랑은 오늘 제2독서에서 들려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9). 어떠한 것도 갈라놓거나 떼어 놓을 수 없는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
32. 이웃집이나 마을에서 열리는 굿에 참석해도 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 전통의 추종자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면서도, 평화로운 정신으로 그들에게 그들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도전을 제기해야 한다"(「대화와 선포」32항)
굿은 무속의 제례 행위입니다. 무당은 굿판을 통하여 신령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신령과 인간 사이의 화해는 물론 사람들 사이에 맺힌 한(恨)을 풀어 줌으로써 굿판에 함께한 사람들 사이의 흐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며, 공동체가 함께 복을 나누도록 인도한다고 합니다.
고조선과 삼국 시대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와 관련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즐겼는데, 이러한 제천 의식은 국가 차원의 굿이었습니다. 재앙과 액운으로부터 마을 공동체를 지켜 주고 풍농과 풍어를 비는 마을굿, 집안의 안녕과 길복을 기원하는 재수굿, 죽은 넋을 위로하는 사령(死靈)굿 등, 우리민족의 다양한 삶의 맥락 안에서 사회와 함께하였습니다.
굿은 민속 문화와 이웃 종교의 의식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민속 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또 이웃과 마을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굿판을 참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신자가 무속의 의식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며,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직접 굿당을 찾아가 굿을 주문하거나 점을 치는 것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긋하는 행위입니다.
생명을 사는,다양한 가족들이 있다
아래의 글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배우는 가족의 형태에 대한 질문의 답변들이다.
"애니메이션 짱구의 가족은 핵가족입니다."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가족은 확대가족입니다."
"축구선수 박주호와 나은이 가족은 다문화가족입니다."
주일학교 가족이 많이 달라졌다. 주일학교 가정을 면담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부러운(?) 가정들도 만나고, 마음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드는 가족들을 만나기도 한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가족의 세대수에 따라 핵가족, 확대가족도 있고, 구성원의 특징에 따라 조손가족, 다문화가족, 한부모가족, 재혼가족, 입양가족, 펫팸족 등이 있다. 한편으로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한집을 여러 입주자에게 임대하는 거주형태인'쉐어하우스'(share house)나 개인 여럿이 한 집을 임대 사용하는 '룸 쉐어(room share)로 인해 새로운 가족의 형태들도 생겼다.
하지만 아이들은 또 다른 질문들도 한다.
"뽀로로와 친구들은 어떤 가족일까요?" "미국은 남자랑 남자랑 결혼할 수 있어요?"
"남자 사이에 있는 아이는 어떻게 생긴 건가요?", "정말 동물도 가족으로 인정하게 될까요?
어른인 나로서는 아이들의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오늘날 가족의 다양한 모습들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그리 당황스런 일도 아니다. 분명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있는 이웃들을 인정할 수 있겠다.
우리가 기존의 가족을 상상할 때 가족 안의 소속감, 안정감, 지속성 등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생명이 홀로 있지 않고, 다른 생명과 함께, 그리고 그안에 생명이 살고 있다(항상성)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구성원이 이혼가정, 한부모, 장애인들, 성적소수자들, 반려동물 등으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한 생명이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생명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만물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은 그 어떤 생명도 이 세상에 홀로 남겨두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영일 야고보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대전교구 담당
믿음의 바다는
작은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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