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모든 2 2019. 10. 6. 21:00

 한스 멤링「최후의 심판 세폭 제단화」(부분)

1467-71,단지카,나르도베 미술관

 

 

    +   루카 복음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뜨니,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자락을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형제가 있는데,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하고 대답하자,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이주민과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며   -박찬인 마태오 천안이주사목 전담-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면서 제105차 세계 이민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민의 날을 맞이하여 2015년 9월 3일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린 한 장의 사진이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그리스로 탈출하다가 터키 해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세살배기 어린아이, 아일란 쿠르디.

 

  이 어린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전해 주는 사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시리아 난민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전 세계 각 나라도 그동안 무관심해 왔던 이주민과 난민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인 대책을 통해 해결하려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징표에 따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5년 담화문을 통해 "환대하기,보호하기,증진하기, 통합하기"라는 이주민과 난민을 향한 4가지 핵심 메시지를 통해 인종,국경을 초월한 보편적인 인류애로 이주민을 받아들이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빠른 속도로 다인종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이러한 교황님의 메시지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2018년 통계에 따르면, 1998년 30만 명에 불과했던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는 2018년 7배인 230만 명에 이르렀고, 이는 2018년 우리나라 전체 인구(51,811,167명)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교황님의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최근 예멘 출신 난민 500여 명이 제주도에 입국해 난민 지위 인정을 요청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열악한 사정이 메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계 각층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었다는 기사를 들었습니다. 비단 이 일화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도 천안 모이세에서 이주민들과 생활하면서 온정의 손길을 주시는 많은 은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주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인종을 초월한 더 넓은 인류애의 가치가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책망을 받는 것은 부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가 풍부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 주위에 또 다른 소외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무관심이 아닌 사랑 가득한 관심으로 다가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주민의 날을 맞이하여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 아닌,남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주민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는 한 주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34. 민간 신앙에서 금기로 여기는 것을 신자들도 조심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사도 10,15)

 

  금기는 민간 신앙에서 특정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며, '터부(taboo)는 위험한 것을 금지하는 강하고 확실한 표시를 뜻하는 폴리네시아어 입니다.

 

  무속의 전통은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이원론의 시각에서 더러움, 곧 '부정(不淨)을 타지 않는 것이 제의의 성공과 결부된다고 여겼습니다. 출산을 하는 여성, 사람의 죽음,낯선 사람 등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 집단적 제의에서 배재하였습니다. '기중'(其中)이라는 표시를 초상집 앞에 써 붙이는 것이나, 죽은 사람의 물건을 태우는 것이나, 상갓집에 다녀온 사람이 집안에 들어오기 전에 그에게 소금을 뿌리는 행위 등은 이러한 금기와 관련된 풍속입니다.

 

  낯설거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물건이나 동물을 보면 '재수가 없다'는 생각이나 '오늘은 며칠이니 어느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생각과 같이 때와 방위를 가리는 금기는 일상생활에 확산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부정이 마을 굿을 송두리째 못 쓰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탈이 났다.'고 하거나 '빌미'라고 일컬었습니다. 이와 같이 금기는 공동체 전체에 신중한 몸가짐을 요구하고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민간 신앙의 금기나 터부에 괘념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은 금기시되는 음식 규정과 제의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지만,예수 그리스도께서 단한 번의 예물로 사람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히브10,14참조)뒤로 그러한 규정은 효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금기나 터부에 마음을 쓰기보다,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계명에 따른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더 중요시합니다.

 

 

면면장免面墻

 

  "알아야 면장을 하지!" 무식함을 한탄하면서 흔히들 쓰는 말이다. 여기서 '면장'이란 면의 행정을 주관하는 '면장免面'이 아니라 담벼락 마주보는 답답함에서 벗어난다는 '면면장免面墻'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정확한 표현은 "알아야 면면장免面墻하지!" 혹은 "알아야 면장免面에서 벗어나지!"이다. 배우지 않음은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배우고 익힘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공자님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말이다.

 

  공자님의 이 말씀을 우리의 신앙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우리 또한 열심히 배우고 깨우쳐 알지 못하면 담벼락을 마주보듯이 우물 안의 개구리마냥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냥 혼자 답답하고 말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자칫 옳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겨 그릇된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교회가 가르치는'사회교리'를 거부하며 그것이 마치 '좌경용공사상'인 것처럼 공공연하게 떠드는가 하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종복좌파'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당에 다니며 미사와 기도와 열심이지만 사제의 강론에 나오는 세상 속 고통받는 이들과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싫어서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가는'(마르1,25-26 참조) 사람들도 있다. "하느님을 잘못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그들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 속에 살아가면서 그토록 커다란 여러 악을 평화라고 부른다."(지혜 14,22)결국 이 모든 게 배우고 깨달아 알지 못해 그런 것이리라.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예수님의 탄식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 배우고 깨우쳐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시대 교회와 세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여야 한다. 정녕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하늘과 바람

나무와 풀꽃

시냇물

풀벌레의 울음과

이 땅 위를 비추는

야무진 빛 방울들

가을,
크거나 아주 크거나

작거나 아주 작은

이 모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합니다.

-글.그림 이순구 (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