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넬로 다 메시나「서재에 있는 성 예로니모」1474,패널에 유채, 45.7×36.2cm,런던, 내서널 갤러리
+ 루카 복음 14,1.7-14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말씀의 향기>
살찐 신부의 밥 이야기 - 박주환 미카엘 병원사목 전담 -
새 신부 때부터 지금까지 본당과 여러 사목지에서 겪는 중요한 일 하나는 바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단체와 사람들과의 식사자리가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 남은 것은 불룩 나와 있는 뱃살뿐입니다. 한 번은 시내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떤 모르는 여성이 저에게 '천주교신부가 돼지 같이 살이 쪘느냐'고 비아낭거리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일은 식사 자리에 초대받아 가면 여기로 저기로 앉으라고 하시는 권유에 진땀이 납니다. 새파랗게 젊은 신부가 상석에 앉으라는 것이 싫어서 끝자리에 앉아 있으면 이리 와서 자리하라 강권하시는 뜻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식사 내내 여간 불편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서로들 적게 덜어 먹는데 저에게는 더 먹으라고 퍼주는 음식을 보고 있노라면 어떨 땐 내가 밥 먹으려고 신부가 된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적당히 덜어 먹고 본인이 먹지 않는 것은 저에게 강권하지 말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식사자리에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 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이에게 '초대에 보답을 할 수 없는 이들,가난한 이들,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는 요청을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과 '사심 없는 마음'이 그 길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은총 외에는 공짜가 없음을 매일의 삶에서, 특히 병원에서 만나는 이들 안에서 항상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 또한 지금 여기서 보답을 바라는 마음, 드러나고 싶은 마음이 있음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우선하는 예수님의 보답을 바라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세상 나라 안에서도 '김영란법'이 있는데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우리 지상 교회 안에도 비슷한 구체적인 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형제자매님들께서 식사 한번 같이하자고 세 번 이야기 하시면 한 번은 갑니다. 그 한 번도 제가 사드리려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물론 함께 식사를 하며 친교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교회로부터 받는 몫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나 가족들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에 쓰셨스면 좋겠습니다. 신부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도 선뜻 이야기를 못하는 분들이 더 많이 계십니다. 대접받고 밥 먹는 것보다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성체성사의 삶으로 예수님께 보답 받을 수 있는 일을 더불어 찾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하는 그리스도인'이고 싶습니다.
한국 천주교와 이웃 종교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히 편찬 -
26. '환생'은 정말 있습니까?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진다"(히브9,27)
영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환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죽음을 생물학적 단절을 넘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뉴에이지(New Age)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 안에 신적인 것이 내재한다는 입장이나 만물 안에 신성이 내재해 있다는 범신론의 경향을 띠는데,, 그리스도교는 예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단호히 거부해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의 환생론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불교의 윤회는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고통의 수레바퀴와 같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지만,현대의 환생론은 오히려 끝없는 삶의 순환을 고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환생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뿐인 생명을 하느님에게서 선사받아 세상에 태어나고 죽음으로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 도달하는 여정을 걸어갑니다. 불행하게 인생을 미감한 이들을 위하여 '패자부활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논리로 환생을 정당화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 악과 모순에서 해방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은 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위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27. 조상을 잘못 모시면 벌을 받거나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까?
"넘치는 사랑을 베풀고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며 결백과 진실의 모범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의 근거가 되는 '대속'의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넘치는 사랑은 우리를 모두 구원해 줍니다."([강생의 신비],10항)
돌아가신 조상을 잘 섬기면 자손들이 큰 복을 얻고, 잘못 섬기면 화를 입는다는 생각이 대중사이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섬기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처럼 하라"(事死如事生)는 유교의 효가 보은사상과 연결되어 우리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최근에는 그릇된 '가계 치유'신심이 퍼지고 있습니다. 집안에 큰 죄를 짓거나 한을 품고 죽은 조상이 있으면 자손들이 안녕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위하여 많은 예물과 기도를 봉헌해야 한다는 가계 치유 신심은 조상에 대한 효와 공경 사상을 그리스도교적 틀로 왜곡한 결과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가계 치유 신심을 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모든 이가 하느님의 품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이의 영혼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모든 성인의 전구와 그리스도교 전체 공동체의 기도를 통하여 필요한 도움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거룩한 농부의 마음
요즈음 한참 고추를 따고 있다. 고추농사 지으시는 회장님께 작황을 여쭈었더니, 고추가 얼룩덜룩해지면서 속에 곰팡이가 나는 것들이 많아져서 버려야 하는 놈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근디,많은 사람들이 그냥 말려서 팔어먹어유..."라고 하신다.
아무리 인증을 받고 검사를 한다고 하지만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 농산물의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농부가 어떠한 신앙과 철학(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농산물의 가치와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농부가 농산물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며 지은 농산물에는 제초제와 살충제, 화학비료 성분이 풍부할 것이다. 당연히 그 외향은 토실토실하고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져 있을 테고, 자연의 순리보다 현대 과학의 요술로 주부들의 눈에 쏙 들게끔 '제작'되어 마트에 진열된다.
가톨릭 농민회원들은 '곰팡이 슬어 있는 거~내가 먹기 껄쩍지근한 거를 내다 팔믄 안되지유~'라고 하시며 하늘이 주시는 만큼,내가 노력한 만큼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신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이러한 농부들의 거룩한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당신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때깔과 크기와 외양 등만을 보고 농산물을 구매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하니 오염된 농부의 마음은 쉽게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때깔만 좋고! 크고! 잘생기게만 만들자!' 이때부터 농산물은 더 이상 하늘과 땅의 기운과 농부의 정성을 머금은 '먹거리'라기보다는 '사람이 먹어도 될까?'싶은,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공산품'과 유사한 아주 위험한 먹거리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내 생명을 지탱해주는 먹거리를 생산하시는 분은 어떤 마음을 가진 분이실까?
- 강승수 요셉 신부 대전가톨릭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
살아온 날들이
조금은 비뚤고 틀어져
불편하여도
살며 묻어 있는
숨소리며 손길들이
천천히,천천히
녹아낸 아름다움이니,
천상의 아름다움이니,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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