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9년 주보

연중 제20주일 2019년 8월 18일(다해)

모든 2 2019. 8. 18. 21:30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 「진짜 십자가를 식별하는 성녀 헬레나」

1452~60,프레스코 벽화,아레초, 성 프란치스코성당

 

 

  + 루카 복음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말씀의 향기>

 

  자비로운 사랑의 불기리 되기를  -조규석 레오 온양모종동 주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성경에서 '불'이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불은 죄인에 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서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고, 아하즈야 임금이 엘리야 예언자를 잡으러 군사들을 보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둘째,불은 사람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정화해 주며 죄인들이 용서를 받아 하느님과 화해활 수 있게 해 주는 성령의 불이기도 합니다.

  세째, 불은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뼈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예레 20,9)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냐?"라는 말씀은 이 '불'의 각 의미에 맞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말씀은 이 '불'의 각 의미에 맞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셨고, 이 말씀의 선포 앞에서 적당한 타협이나 비겁한 양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씀'을 삼키거나 '해야 할 행동'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유다인들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분열하였고, 충돌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일을 하거나,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예기치 않은 분열과 충돌을 만나게 되고, 겪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들 안에서 "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나는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야", "예수님께서도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잖아", "이런 일은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양보 없이 그리고 타협 없이 하셨지만, 동시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의 길에서 자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며 먼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로움은 당신의 반대편에 선 자들에 대해 자비로움을 잃어버린 냉혹한 정의가 아니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요한 10,11) 착한 목자의 정의였고,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깊은 사랑의 정의로움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와 이웃 종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 위원회 편찬-

 

22. 길일을 받아 이사나 혼인을 하는 것은 신앙에 위배 됩니까?

 

"이 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117],24)

 

  역학(易學)에서 천체의 운이 좋은 날을 길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길일에 행사를 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날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성술이나 사주팔자에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긋납니다.

  이사나 혼인 등 가정의 중요한 일정을 정할 때 길일에 연연하기보다 가족과 친지의 사정이나 주변의 상황을 검토하여 모두에게 유익한 날짜를 잡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날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맡겨진 날입니다.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23. 사주팔자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5)

 

  우리 조상들은 날(日)을 세는 데서 비롯한 십간(十干)과 달(月)을 세는 데서 비롯한 십이지(十二支)를 이용하여 연월일을 표시하였습니다. 사주는 한사람이 태어난 연(年),월(月),일(日),시(時)를,팔자는 사주의 간지가 되는 여덟 글자를 가리킵니다. 본디 사주팔자는 한 사람의 생년월일을 나타내는데, 나중에 음양오행설과 만나면서 한 사람의 타고난 운명이나 인간관계 그리고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수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태어난 시간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천체의 운행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그와 사귀시며 그를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돌보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자신의 삶을 펼치고 실현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온갖 장애를 이겨 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사회와 교회를 잇는 길잡이 사잇길>

 

꿈꾸는 오늘

 

  이른 시간입니다. 생생한 기억들 그러나 현실이 아닌 무의식이 전해주는 소리를 듣고 보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노트에 쓰고 분석합니다. 건강에 대한 메시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주어진 일을 하면서 경험 할 어떤 내용에 대한 소리처럼 들립니다. 가끔 꿈을 꿉니다. 조금은 비관적인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할 일을 찾는 것 같습니다.

 

  매일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싸움은, "The More"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수직과 직선적 삶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자들의 욕구가 현실 안에서 드러날 때 일어납니다. 그들의 신조는 "더 많이"그리고 "더욱 더 많이"입니다.

 

  "The More"의 깃발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창고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우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소진시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지런히 일해서 모은 소중한 자산들이 물에 휩슬리거나 산산이 조각나고 쓰레기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2019년 6월 5일, '호주국립기후복원센터'의 정책보고서는 30년 뒤 대부분의 인류문명이 파멸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지금처럼 산다면,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삶은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기술이 기적을 낳으리라."라는 주술적 사고에 휩싸인 자들이 내미는 썩은 동아줄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치인들과 부유한 사람들은, 선의의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과 부를 나눔으로써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외침과 요구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비관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꿈을 꿉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아래로부터 끓어오르기를,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자각이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 오늘을, 꿈꿉니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람과 사람

되뇌어 보아도

사람,

 

하늘 꽃.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