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베로니카의 수건[10]

모든 2 2019. 7. 14. 20:11




엘 그레코, 수건을 든 베로니카

1577~80, 캔버스에 유채, 84 cm * 91 cm, 산타쿠루즈 성당,톨레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해골산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베로니카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용감하게 예수님께 다가가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피땀을 닦아드렸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얼굴이 찍혔다. 십자가의 길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다"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베로니카의 수건>이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부터이다. 화가들이 그린 예수님의 얼굴을 성안(Volto Santl, 聖顔)이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가시관을 쓴 모습이지만 때로는 가시관 없이 그려지기도 한다. 14처가 오늘날의 내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 때이며 베로니카에 대한 공경도 뜨거워졌다고 한다.


<수건을 든 베로니카>

  엘 그레코의 그리에서 베로니카는 두 손으로 가시관을 쓴 예수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들고 있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예수님은 그리을 보는 관람자의 눈과 딱 마주치고 있다. 반면 수건을 들고 있는 베로니카는 슬픔에 젖은 표정으로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역할은 예수님의 ㅣ얼굴이 찍힌 수건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그림 속 주인공 자리를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드린 것이다.

  베로니카가 들고 있는 수건의 주름은 너무나 정교하게 그려졌다. 배경은 이 시대 그림으로는 드물게 완전히 검게 처리하여 관객의 시선을 베로니카와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화가의 깊은 묵상은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성화의 거장 엘 그레코(1541~1614)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나 주된 활동은 스페인 왕실 궁정과 톨레도에서 했다. 엘그레코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소집되어 18년간 이어진 트렌토 공의회에서 정비된 가톨릭교회의 개혁정신을 그림으로 설파한 16세기 말 매너리즘 양식의 거장이다.



조르주 루오, 「베로니카」, 1945년경, 캔버스에 유채, 50×36cm, 파리, 퐁피두센터.



  <조르주 루오의 베로니카>

  주보 표지에 소개된 조르주 루오의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이 보이지 않는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성안이 찍혀 있는 수건을

들고 있기에 존재했는데 베로니카만 그리다니 새로운 발상이다.

  여기서 베로니카는 베일을 쓰고 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눈망울이 큰 여인다. 루오의 많은 작품들이 짙은 색채로 어둡게 표현된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밝은 파스텔톤으로 그려졌다. 표정 또한 루오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라 연민과 아름다움이 승화된 얼굴이다.

  조르주 루오(1871~1958)는 20세기 초 파리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 탄생에 기여했다. 20세기초 미술른 과거의 미술에 대한 도전과 반항의 역사다. 야수파의 창시자 마티스가 아내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그린 것을 시작으로 야수파는 자연을 재현한 전통적인 색채가 아니라 작가 내면의 강렬한 세계를 추상적인 색채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정신을 담고자 했던 20세기초 파리 중심의 현대 미술은 교회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술가들이 더 이산 성화를 제작하지 않음으로써 2천년 가까이 긴밀하게 유지되던 교회와 미술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루오는 샤갈과 함께 종교 주제를 지속한 몇 안 되는 현대미술의 거장이다.최근 정양모, 정웅모 형제 신부는 루오의 판화 연작<불쌍히 여기소서, Miserere>를 묵상한 책을 출판하였다.



   - 가톨릭 신문 2009년 12월 13일 -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를 때 이를 지켜보던 많은 군중 가운데 베로니카도 있었다. 그녀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는데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최초의 초상화이자 그리스도 이콘의 원형으로서 베로니카의 수건이라 불린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실존 인물의 이름이라기보다는 vera icona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짜 이미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성녀 베로니카는 이후 가장 공경받는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했던 중세 말부터 베로니카의 수건에 대한 공경은 더욱 커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에 모셔졌던 베로니카의 수건을 보기 위해 로마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단테도 “나의 여인 베아트리체가 찬미하고 공경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 위해 로마에 간다”라고 적은 글이 있다.

  많은 화가들이 베로니카의 수건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본 기획연재에서도 엘그레코가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다. 화가들은 보통 수건에 찍힌 예수님의 얼굴만 그리던가 아니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이 찍힌 수건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이 작품은 베로니카가 들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베로니카의 얼굴 만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유형을 보인다. 베로니카는 그 수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데 수건은 없이 베로니카 만을 그리다니 새로운 발상이다. 루오의 베로니카는 베일을 쓰고 있으며 얼굴이 갸름하고 눈망울이 큰 청순한 여인이다. 루오의 많은 작품들이 짙은 색채로 어둡게 표현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밝은 파스텔톤으로 그려졌다. 표정 또한 루오의 작품들이 고통에 일그러져 있는 것과 달리 연민과 아름다움이 승화된 고운 얼굴이다.

  루오는 20세기 초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마티스와 함께 1905년 살롱 도톤느 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야수파가 탄생했다. 20세기 초 미술의 역사는 과거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반항의 역사이다. 야수파라는 이름은 자연을 모방한 전통적인 사실주의 색채가 아니라 작가 내면의 강렬하고 추상적인 색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창립회원이었던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루오의 작품은 야수파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그의 색채는 야수파 특유 원색의 강렬함이 거의 보이지 않고, 대단히 어둡고 무겁게 표현되었다. 루오가 20세기 미술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종교화에 있다. 과거의 미술은 대부분이 종교화였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종교화는 화가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루오는 ‘수난 받는 그리스도’를 비롯해 성경의 주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과 고뇌를 종교화에 쏟아부었다.

  루오의 귀한 작품들을 12월 15일부터 예술의 전당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20세기 최고의 거장의 한 사람인 루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금년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듬뿍 받은 느낌이다.


   -고종희·한양여대 교수·서양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