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성당(홍성지구)
본당 설립 : 1968.7.12/주보성인 : 성모 성심
마르코 복음 7,1-8.14-15.21-23
<너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말씀의 향기>
손 씻기보다 더 중요한 마음 씻기 - 박재만 타대오 대전성모병원장
우리는 외출 후 돌아왔을 때나 식사 전에는 손을 씻습니다. 그러한 규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결과 감염예방이라는 위생적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도 식사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생적 이유 때문이 아니고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내려온 엄격한 종교적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ㅗ고 예수님께 따지듯이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예수님은 그 상황을 교육(마르 7,1-23)의 기회로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핵심 바로 이것입니다.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씻는 일이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관습이 단지 외적 형식이나 인간을 얽어매는 올가미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돕는 방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실상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 관습의 겉치레만 고집하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거나 외출 후 돌아와 몸을 씻는 관습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지적하신 것은 손고 몸을 씻는 데에 그토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그들이 정작 자신의 마음을 씻는 일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관습만을 중요시 여기며 이를 어기는 이들을 거세게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계명 즉 사랑의 실천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신심단체 등 교회의 여러 단체에서 활동할 때에도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망각한 채 규정을 따지는 데에만 급급하여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규율을 지나치게 강요함으로써 가족을 힘들게 하고 화목을 깨트리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손을 씻고 목욕을 합니다. 우리의 손과 몸을 씻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자주 씻어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이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정화 예식을 했다면 우리는 천상의 양식인 성체를 잘 모시기 위해서 손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깨끗이 정화하도록 더욱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봉헌 생활(4) - 윤진 니꼴라 수녀. 거룩한 말씀의 회
수도 공동체, 주님의 이름 아래 집합된 참된 가족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과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갈라지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특별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봉헌 1)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순수한 복음 정신인 자기 포기와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느님을 찾기 위해 속세를 떠나는 '포기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의 평화를 등진 사막의 은수자들이 3세기부터 있어 왔고, 이는 점차 초기 교회를 모범으로 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주님의 이름 아래 참된 가족을 이루는 공동체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수도 15 참조)
수도 공동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공수(共修) 생활은 은수자였던 성 빠고미오(290-346)가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의 "수도승(monachus)"이라는 표현 대신 "형제"라는 표현을 주로 쓰며, 수도 생활의 역사에 있어서 첫 번째 회칙이라 할 수 있는 공동체의 규칙이 작성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영적 지도가 이루어지던 은수 생활이 형제적 상호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이 두 가지의 형태는 450년 경에 접어들면서 장상과 수하 그리고 상호적 친교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 생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수도 생활의 형태는 서 아우구스티노와 성 베네딕도에 이르러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인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쓰여진 규칙(회칙) 들이 발전되면서 현대 수도 생활의 기틀을 잡게 됩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형태에 있어서 다양한 역사적 변천이나 발전 과정보다 중요하게 기억할 것은, 이러한 모든 형태의 수도 생활의 기원과 동기로,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자기 포기와 그리스도를 따름을 자신들의 삶으로 선택하고 살기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정신으로 수도 생활은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신앙 쇄신의 원동력이 되고, 복음 선교를 위한 교회의 부르심에 충실하려 부단히 노력하며 주님께서 주신 복음 선포의 사명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봉헌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수도 생활 역사에 있어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것처럼 313년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어 세속 권력과 얽히게 되었을 때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만을 찾았고, 개별적 신앙의 열성으로 치우칠 때는 공동체 생활로써 그리스도교 본연의 모습을 증거 했으며, 귀족 중심의 중세시대에는 가난의 실천과 설교를 통해(성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경종이 되어 왔습니다. 이밖에도 성령께서는 수많은 수도회 창립자들을 통해 그 시대에 필요한 복음적 쇄신의 카리스마(은사)를 주심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신앙의 증거가 끊이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또한 수도 공동체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 모두가 한가족, 형제자매임을 상기시키는 예표가 되고, 하늘나라의 기쁨을 살아가는 표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 어쩌나] 307. 오로지 말씀으로만? -홍성남 신부님-
문 : 오로지 성경 말씀에만 마음을 두고 그 이외의 것에는 눈을 돌리지 말라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믿음에 대해서나 성경에 대하여 절대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을 갖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분들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엄격한 생활을 하셔서 감히 아무도 그분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데 과연 그분들의 말처럼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요?
답: 형제님의 의구심은 당연합니다. 그분들의 신앙적 오류를 한 가지씩 짚어드리지요. 우선 '오로지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이미 개신교에서 주장한 바 있지만, 성경 말씀으로 사는 것을 그런 식으로 좁게 받아들인다면 내적 성장에 저해가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대명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상황에 따른 세부적 지시사항이 아니란 것이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때 주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세부적 선택을 하는 것이 건강한 방법이지 작은 선택을 할 때마다 일일이 성경에서 근거가 되는 구절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자칫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또 성경을 자주 보고 외우다시피 하면 성경을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같은 구절을 보면서도 이해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연령마다 다르고 성별에 따라 다르고 성장 과정에 따라서도 달리 이해되는 것이기에 성경을 제대로 보려면 자기 마음도 같이 들여다 보야야 합니다. 자기 욕구나 상처 등등의 여러 가지 영향 요소들이 선택적으로 성경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자기부정 역시 그리 건강한 신앙생활 방법은 아닙니다. 영성 심리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가진 욕구를 절제하는 것과 자기부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심각한 자기부정은 자칫 종교적 우울증, 종교적 불안증을 야기할 위험이 큽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건전한 수평적 관계를 갖지도 못하는데 그런 병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주님의 말씀에는 귀를 막고 종의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숨겨진 교만'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나친 자기부정은 하느님 용서의 손길을 뿌리치는 행위인데 이런 행위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만해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하느님도 자기를 용서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교만, 소위 '당신들이 나를 알아?' 하는 거만한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의 믿음은 늘 물음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라는 말은 어떤 회사의 광고 문구지 신앙인들의 명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하여 의문은 커녕 묻는 것조차 불신앙이나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인가? 성장 과정의 부작용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성장 과정 중 호기심이 발동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때 부모님들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폭언을 행사했을 경우 아이들은 침묵을 지키게 되고, 하느님을 부모님과 동일시하여서 감히 신앙이나 성경에 대한 물음이나 의문을 가질 엄두를 못 내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은 유아적 신앙, 성장이 멈춘 신앙이라고 합니다. 중세수도원에서 대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성장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장 단계마다 배우는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병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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