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 성당(아산지구)
본당 설립:1890/주보성인:성 베네딕토
요한복음.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말씀의 향기>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 우희수 발타 살 예산 산성리 주임
어려서 어버이를 모두 잃은 사람을 고아라고 한다. 고아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동정만 받고 자라서 사랑할 줄을 모르고 사랑받기만을 바란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 견해는 제가 어려서 가까이에서 고아들을 보면서 느꼈던 제 주관에 의한 판단이기에 이견을 가진 분이나 고아로 자란 분들에게는 깊은 양해를 청한다.
몇 주일째 우리는 생명의 빵을 주신 하느님의 큰 사랑을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 성체성사의 교리는 가장 깊은 신비에 싸인 교리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고 오늘 복음은 말한다.
지금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면 그들은 우리를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우리 죄 많은 인간들에게 내어주시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지금도 성체성사로 지키신다. 이렇게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서 살고 있고 날마다 생명의 빵이라는 행복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큰 사람에 어떻게 보답해드리는가?
우리는 주님을 모르고 살고 있는 많은 사람과 다르게 살면서 그들에게 무슨 본보기가 되고 있는가? 마치 고아들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되돌려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 큰 사랑을 자주 잊어버리고 마치 고아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 늘 자신을 살피는 신앙인이 되자.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옛날부터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욕을 먹고살았다. 우리 사람과 가장 가까운 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정확히 구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정을 표현한다. 신앙인들이 지성이 없는 동물만큼이라도 하느님을 고마워하면서 살고 있을까? 현대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건강이 아닐까?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날마다 주님의 밥상으로 나가는 사람이 오늘의 독서에서 말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닐까?
미사 때 성작을 닦으면서 사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성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이라는 뜻일 것이다. 늘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마음의 가장 좋은 곳에 모시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슬기로운 사람, 주님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사는 행복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봉헌 생활(2) -윤진 니꼴라 수녀/거룩한 말씀의 회
응답, 세례 성사로 받은 은총의 보다 풍부한 결실
지난주 말미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봉헌 생활의 해"가 봉헌 생활자들인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뜻깊은 은총으로 기억해야 하는 "받은 은총의 선물"을 다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이 나눔의 장을 펼쳐내며 세상의 수많은 모순된 요구들에 지쳐, 살아가는 입맛마저 떨어져 있는지 모를 누군가를 다시 살맛 나게 하고 기운 차리게 할 사명을 수도자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왜냐하면, 세례 성사의 은총이 볻 풍부한 결실을 얻기 위하여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신자 자신이 스스로 받아들여, 지극한 사랑의 열정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어 신부(新婦)인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신 그리스도를 더 잘 드러내는 봉헌의 삶을 통하여,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중간 신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성화에 속하는 신분으로서 교회 안에서 기묘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몫으로 불리웠고 기꺼이 이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교회 헌장 43-45 참조)
그러나 이렇게 멋진 신분과 사명을 부여받은 수도자의 봉헌 생활은 결코 녹녹하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그렇게나 이상적인 삶이니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이상을 눈에 보이도록 증거 하는, 너무나 막막한 과제를 풀어보겠다고 손들고 나섰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만, 더 중요한 건 스스로 내가 엉겁결에 손들고 나선 건 아닌지 불러주신 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진실에 대한 의심이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성인들과 신학자들이 고백하듯 신앙이란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생 동안 견뎌내는 일이기에, 정말 이해하고 싶어 못 견뎌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맙니다. 신앙의 신비를 어떻게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교회는 수도생활을 일컬어 "교회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교회가 주님께 받은 선물"(가톨릭 교회 교리서 926항)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교회의 신비이며 선물인 수도생활은 다른 모든 삶의 성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주도하신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자신을 뽑아 세우셨다는(요한 25,16 참조) 확신에 찬 응답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수도자에게 있어 이 응답의 구체적인 모습은, 교회와 세상의 선익을 위하여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선물(카리스마)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수도회를 통하여, "교회의 생활에 참여하며 성서, 전례, 교의, 사목,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 선교 및 사회문제 등 제 분야에 있어서의 교회의 활동과 의도를 각 회의 고유한 성격을 따라 자기 것을 하여 힘써"(수도 교령 2항) 살아감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다음에는 봉헌 생활의 역사와 형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74)>
공동체(共同體)는 공동체(共通體)다
행복한 집엔 소통의 바람이 통한다
매주 주일미사에 꼬빡꼬빡 잘 참석하던 미주 엄마, 그런 미주 엄마가 오늘은 성당에 가지 않으려 하자 늘 성당에 함께 가던 은영이 엄마가 무슨 일인지 전화를 합니다.
은영 엄마 : 미주 엄마, 성당 안 가요?
미주 엄마 : 이번 주는 그냥 집에 있으려고요
은영 엄마 : 왜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미주 엄마 : 성당 가서 미사 드리는 건 좋은데..
은영 엄마 : 근데 뭐가 문제예요?
미주 엄마 : 미사 후에 단체모임이 부담스러워서요
은영 엄마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주 엄마 : 모이면 서로 자기주장만 해서 분위기가 썰렁해도
은영 엄마 : 여러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미주 엄마 : 그래도 뭔가 통하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일이 많아 몸이 힘들면 잘 쉬면 됩니다. 푹 자거나 목욕탕이라도 다녀오면 피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는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그 고통이 쉽게 풀어지지 않습니다. 소통이 없는 인간관계는 그만큼 우리에게 깊은 상처와 절망을 안겨 주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 우리는 분명 천주교 공동체 안에서 생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않으면 그것을 진정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하느님 한 분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믿음만으로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소통해야 진짜 공동체가 완성됩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따뜻한 마음을 교환하며, 내 주장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소통의 '공통체(共通體)'가 행복한 공동체의 필수 조건입니다.
하느님은 믿는데 이웃은 믿을 수 없다면, 하느님의 희생에는 감동하면서 이웃의 희생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면, 이 순간 옆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도 그 사람의 기도에 작은 관심마저 없다면, 우리는 행복한 공통체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공동체(共通體) 안에 머무는 고독한 나그네일 뿐입니다.
통풍과 채광이 좋은 집의 조건이듯, 소통과 배려가 행복한 공동체의 조건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어느새
하늘 한 조각
곱게 익어
가지런한 마음으로
내려옵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브에스나의 감사 편지
사랑하는 하기동 신부님과 신자 여러분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으로 살려주신 캄보디아 청년 브에스나입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한국에 온 지 벌써 3개월이 되었고 오늘은 치료를 끝내고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여러분 저의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옛 모습 궁금하시죠? 그럼 먼저 제가 간단하게 저의 옛 모습과 저의 새로 거듭난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외동아들입니다. 제가 16살이던 어느 날 부모님께서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 인생은 확 바뀌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너무 캄캄하며 외롭고 배고팠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아무리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에 점점 희망과 꿈이 사라졌습니다. 힘들 때나 지쳤을 때도 위로해 주는 사람, 칭찬해주는 사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가족들을 바라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립고 옛 생각납니다. 만약 우리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도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보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아직 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습니다. 다시 '아버지, 어머니"라 부를 수 있고 '내 아들아."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품고 다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 같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거듭나게 해 주셔서 정말로 기적 같습니다. 한국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많은 분들이 잘 챙겨주셨고 늘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에 이제 저는 튼튼해지고 희망과 꿈도 다시 찾았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보냈던 시간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캄보디아에 돌아가서도 건강관리 잘하면서 열심히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늘 하느님과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항상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드리면, 저는 신자가 아니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배려로 제가 성당에서 생활하면서 신자 분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보다 더 성실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하느님을 알고 싶어 졌고 성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 돌아가서 교리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을 겁니다. 저를 위해 많이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브에스나 올림-
성모여, 울게 하소서(성모승천 1) -이해인 수녀-
하늘에 오르신 성모여,
당신의 기쁨은
눈물에 씻겨 더욱 영롱한 빛이었음을
기억하게 해 주소서
마음 놓고 울 수도 없는
이 어두운 시대
어머니신 당신 앞에조차
울 줄 모르는 아이가 되는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내 때 묻은 영혼을
눈물로 세탁할 정성이 없었음을
지금은 울게 하여 주소서
울 수 있는 것도 은혜임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어머니
자신의 죄를 울 수 없는 자
남을 위해서도 울 수 없음을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잘못이 잘못인 줄도 몰랐던
지난날을 뉘우치며
지금은 당신 앞에
후련한 울음을 쏟아 내게 하소서
사랑할수록 깊어지는
청정한 눈물의 샘터에서
나를 씻게 하소서
절망의 늪으로 침몰했던
죄 많은 날들도
믿음으로 새 옷 입고
부활하게 하소서
마음 놓고 노래할 수도 없는
이 메마른 시대
당신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어머니
아무도 엿보지 않은
내 고통의 밀실에서 타고 있는 기도가
오늘은 당신과 함께
승천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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