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연중 제19주일 2015년 8월9일(나해)

모든 2 2015. 8. 9. 09:05

 대산 성당(서산지구)

본당 설립: 1989.8.19 / 주보성인: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 요한복음.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애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 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말씀의 향기>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조규식 세례자 요한 천안 봉명동 성당 주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라고 가르쳐 주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세우신 성체성사와 연관된다. 제1독서와 제2독서도 작성 연대나 장소가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내용과 관련이 있으며 그것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해서 비교적 길게 설명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진링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수군거리며 믿기 어려워했다. '전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요한 6,42)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라고 가르쳐 주신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생명의 빵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6)"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제1독서는 불과 열 줄 남짓한 짧은 내용이지만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예언자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 말에 활동하던 인물인데 당시 이스라엘 영향으로 바알 신을 섬기는 이들이 많았다. 엘리야는 이제 벨의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절망 속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엘리야는 주님께서 천사를 통ㅇ해 보내주신 '구운 빵과 물 한병"을 "먹고 마신 뒤에"기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멀리 호렙산(시나이산)까지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나 뵙고 예언자로 다시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얻는다. 이 이야기는 장차 예수님께서 세우실 성체성사의 예표가 된다.

 

  제2독서 에페소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 주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그대로 믿고 따름으로써 훌륭히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봉헌 생활(1)  -윤진 니꼴라 수녀. 거룩한 말씀의 회

봉헌, 그 아름다운 드림(DREAM)의 삶

 

  지난 11월 30일부터 돌아오는 주님 봉헌 축일인 2018년 2월 2일까지 우리는 "봉헌 생활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를 맞이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모든 봉헌 생활자들에게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커다란 신뢰로써 자신의 허약함을 고백하는 기회가 되고 그 허약함을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체험으로 살아갈 기회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Lumen gentium"중에서 수도자에 대해 다루고 있는 제6장과 수도생활의 쇄신과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 Perfectae caritatis"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선포된 "봉헌생활의 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증거자를 찾고 있는 세상과 교회에 "필요한 것 한 가지"(루카 10,42)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이 되기 위해 기꺼이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기로 약속한 교회의 공적 사원자들의 희년을 선포하는 "수도 생활의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공언하는 수도 생활은 "성려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른 신자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여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최상으로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교회법 573조 1항)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부터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도록 불리고 이를 따를 것을 충실히 서약"(수도 교령 1항) 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사는 삶이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자기 자신을 참된 제사가 되도록 하느님께 바치는 삶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과 거룩한 친교를 이루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의 삶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성되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해 살고자 세상에 대해 죽는 사람인 한 하나의 제사"(신국론 10,6. 성무일도 연중 28 주간 독서의 기도)라고 수도 생활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보다 더 열심한(교회 헌장 44항 참조) 삶인 봉헌 생활은 매일 미사 중에 듣게 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도록 우리의 삶(vita)이 친교(con)의 거룩한(secrata) 모범이 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dream을 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교황님께서(2014.11.21)이 "봉헌 생활의 해"를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더 잘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며, 그리스도를 따른 참된 신앙으로 봉헌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나가기를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 곳곳에서 살아있는 복음의 기쁨이 되어 말입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73)>

 

  깍두기 태교법이 그립다

 경쟁에 기적은 없다

 

  임신 5개월이 되어 가는 딸이 친정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 친정 엄마는 딸이 책상 위에 앉아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걸 보고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엄마: 뭐하냐?

: 태교 중이에요

엄마: 태교? 근데 왜 수학 문제를 풀고 있어?

: 이렇게 해야 똑똑한 아이를 출산한대요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 요즘 예비엄마들 다 이렇게 태교 해요.

엄마: 말도 안 돼! 그게 무슨 태교야?

: 왜요? 아이를 위해서 엄마가 그 정도는 해야죠!

엄마: 태교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딸 : 엄마 때는 태교를 어떻게 했는데요?

엄마: 심성이 예쁜 아이가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깍두기도 반듯하게 생기지 않은 건 입에도 대지 않았고

방바닥 장판 무늬가 모난 부분에는 앉지도 않았단다.

 

  예전의 엄마들은 그랬습니다. 똑똑한 아이보다 착한 아이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아이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아이의 출생을 기다렸습니다. 임신한 동안 엄마들은 모두 천사의 마음으로 태교를 하셨습니다

 

   요즘도 예전처럼 천사 같은 엄마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가 그런 엄마들의 날개를 꺾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난 후에 시작하는 것도 부족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하는 태교 선행학습으로 엄마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깍두기마저 반듯한 것만 골라 드시는 엄마가 수학 한 문제라도 더 풀어 보려는 엄마보다 존경받는 사회를 꿈꿔 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기적을 경쟁의 기적으로 바꾸려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생(生)!

가끔은

손을 들어 질문하는 것

 

길 위에서

한참

하늘을 보는 것.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CHARISTIA) - 교황 요한 바로로 2세 성하의 회칙 -

 

  31.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정점이라면, 그것은 또한 사제 직무의 중심이며 정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만한 감사의 마음으로, 저는 성찬례가 "성체성사 제정 때에 유효하게 생겨난 성품성사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63)라고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사제들은 공범위하고 다양한 사목 활동에 참여합니다. 현대 세계의 사회 문화적 상황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제들이 그러한 수많은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다운 사랑에서, 사제의 생활과 활동을 통합시켜 주는 끈을 보았습니다.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64)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들이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라는 공의회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사제의 영성 생활과 교회와 세계의 선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신자들이 참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회의 행위입니다.."65) 그렇게 되면 사제들은 중심을 잃게 하는 일상의 긴장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고, 또 사제 생활과 교역의 참된 중심인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다양한 사목 직무를 다룰 때에 필요한 영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일상 활동은 진정한 성찬례가 될 것입니다.

 

  사제 생활과 교역에서 성찬례가 차지하는 중심 자리는 사제성소를 사목적으로 정려 할 때 성찬례가 중심이 되는 토대입니다. 성소를 위한 기도는 성찬례에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가장 밀접하게 결합됩니다. 마찬가지로 성찬 교역을 수행하는 사제들의 성실함은 신자들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이며 충실한 성찬례 참여와 함께, 젊은이들에게 훌륭한 본보기를 보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응답하려는 동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사제성소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자 흔히 사제의 열렬한 목자다운 사랑의 모범을 이용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