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연중 제18주일 2015년 8월2일(나해)

모든 2 2015. 8. 2. 10:27

갈매못성지성당(보령지구)

본당 설립: 2003.2.17/주보성인:성 다블뤼 아토니오 외 네 성인

 

 

+ 요한복음. 6,24-35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 '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과의 친교(7)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과 함께 사신 성모님

 

  창세기 2-3장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가 있는 그 동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ㄱ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이 죽음의 운명을 부활의 새 생명으로 재창조해 주신 분이 말씀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이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로마 15,21-22)

 

  교회의 교부들은 이 선언을 하와와 성모님에게도 적용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뱀의 유혹을 따랐던 하와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죽음이 역사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한 마리아의 순명으로 인해 새 생명의 역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새 아담', 마리아를 '새 하와'라고도 부릅니다.

 

 처녀 마리아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정신에 뿌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이 처녀 마리아의 잉태를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 곧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준비도, 말씀을 받아들여 잉태할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서도 성모님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목자들이 찾아와 전해주는 말에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그리고 잠시 잃었던 어린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찾았을 때 아들이 하는 뜻밖의 말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고 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잘 알고 살아갈 줄 알았던 성모님은 자신의 인식과 기대와는 다른 일을 그대로 마음에 담아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계시가 완성될 때, 성모님 안에 담아놓으신 모든 것이 손상 없이 말할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내어 놓으신 성모님은 곧 교회가 살아가야 할 길을 먼저 걸으신 모범이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신  말씀으로 성모님을 우리 모두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는 데에서 보는 것처럼, 성모님은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지시대로 예루살렘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기다리셨고, 결국 성령강림과 교회 창립의 현장에 함께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신 그분께 일어난 일입니다. 

 

그동안 「말씀과의 친교」를 집필해주신

대전교구 총대리 김종수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72)>

 

드니로 어프로치

 

따라가기보다 되어 보기

 

  '로버트 드니로...'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벌써 영화"대부 2"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계실 것 같습니다. "택시 드라이버"나 "미션", "분노의 주먹"같은 영화에서 그야말로 명품 연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니로'...

 

   그는 "대부 2"를 촬영하기 전 시칠리아 섬에 가서 그 지역 언어를 직접 익혔고, "택시 드라이버"에서는 실제로 몇 개월간 택시를 운전하고 다녔으며, "분노의 주먹"에서는 몰락한 권투선수를 실감 나게 그리기 위해 체중을 27kg 정도 늘였다. 줄였다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런 극성맞은 연기 열정 때문에 생겨난 것이 바로'드니로 어프로치(De Niro's Apporach)라는 연기법입니다. 일종의 '메서드'연기법인 이 기법의 핵심은 "맡은 배역을 연기하지 말고 직접 그 배역이 돼라"는 말로 짧게 요약됩니다.

 

   살다 보면 인생의 '멘토'가 될 만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멘토들은 제게 일종의 주어진 배역처럼 다가옵니다.

닮고 싶고, 따라 하고 싶고, 그분들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배역의 완성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흉내만 내고 있지, 정말 그분들처럼 깊이 있는 감동을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체중을 줄이고, 말투를 흉내 낸다고 해서 멋진 배역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오랜 시간 동안의 부단한 노력만이 필요합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명배우로 인정받는 것은 그의 기이하고 독특한 연기 방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배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성당 안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멘토'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의 발뒤꿈치라도 따라가 보려고 열심히 기도드리며 묵상도 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기는 늘 어설프게 끝나기 마련입니다.

 

   '드니로 어프로치'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할 때입니다. "만약 이 상황이라면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이런 갈등을 겪으실 때 어떤 지혜로운 선택을 하셨을까?"이런 질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닮은 배역을 멋지게 소화해 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주님!

내 시간을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들과

나 때문에

힘들어 했을 사람을 위한

자비와 용서의

기도를 올립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의 밭에 피어나는 꽃들은

어느 하나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겉모습으로는 같아 보여도

안을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릅니다.

 

꽃의 모양과 색깔이 다르고

품고 있는 향기도 다르고

피어나는 시간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들은 말없이 자신의 이름처럼

다소곳이 순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드러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물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오로지 빛을 주시는 하늘만 바라봅니다.

 

짙은 향기 백합꽃이

우리 곁에 있는가 하면

이른 아침에 잠깐 피어나는 나팔꽃도 있고

길섶 낮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들꽃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조연이 있기에 주연이 빛나고

부족한 사람이 있기에

채워진 사람이 돋보이며

어둠이 있음으로

빛의 찬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달란트는 모두 다릅니다.

지금 내 자리에서

내 색깔, 내 모양, 내 향기 따라

어울려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련가요!

 

오해림 루치아/괴정동 성당

 

 

 

일분 지혜 -안소니 드 멜로 신부 -

 

알려짐

 

   아무리 날카롭게 살펴보아도, 스승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상황이 그렇게 되면 겁을 내고 우울해하기도 했다. 웃고 울고 화가 나서 펄펄 뛰는 수도 있었다. 훌륭한 음식을 좋아했고, 한두 잔 마시기를 싫어하지 않았으며, 아름답게 생긴 부인의 모습을 보면 고개를 돌릴 줄도 알았다. 한 여행자가 스승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고 불평하자, 한 제자가 그를 올바르게 이해시켰다. "어떤 사람이 거룩하다는 것과 그가 당신이 보기에 거룩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시련

 

  "재난은 성장과 깨우침을 초래할 수 있다."스승은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매일 어느 새가 황량한 광야 복판에 서 있는 시든 나뭇가지에서 살았다. 어느 날 회오리바람이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려 그 가엾은 새는 할 수 없이 보금자리를 찾아서 백 리도 넘게 날아가야 했다. - 마침내 과일이 달린 나무 숲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는 말했다:

"만일 그 시든 나무가 살아 있었다면, 아무것도 그 새가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고 날아가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