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5년 주보

연중 제 17주일 2015년 7월 26일(나해)

모든 2 2015. 7. 26. 22:54

금산 성당(대전 중부지구)

본당 설립:1929.5.26 / 주보성인: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 마르코 복음, 6,30-34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 자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말씀의 향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박상호 라파엘 대전성모병원 원목 차장

 

   어린 시절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니 빵과 물고기가 커진 것일까?", 아니면 '하늘에서 빵과 물고기가 떨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다른 내용보다 요한복음 사가가 왜 이 신비로운 장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을까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빵을 커지게 하셨는지,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셨는지 아니면 나눔이 실천되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생명의 빵이심을 알려주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일으키실 기적을 알고 필립보에게 질문하십니다. 필립보는 그 질문에 현실적인 문제와 생각만을 언급합니다. 다른 제자인 안드레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은 세상의 것을 초월하여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향해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배만 채우고 살아갈 힘을 얻는 차원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려 하십니다. 그 빵은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빵입니다.

 

 

말씀과의 친교(6)

-총대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말씀과 기도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의 역사에 경탄하며 드리는 찬미와 감사는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빗나가는 배반의 역사도 함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바칩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솔로몬 그리고 수많은 예언자들은 구원의 역사를 찬미하며 자신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두고 탄원과 간절한 청원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을 따른 사람들이 삶에서 기도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사도행전이 많은 영감을 줍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예수님은 이전처럼 그들 곁에 계시지 않기에 지금의 우리와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곁을 떠나신 뒤 사도들과 성모님에 대해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그리고 성령 강림 직후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삼천 명에 대하여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고 전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으라고 할 때에도 사도들 자신에 관해서는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라고 말합니다. 그 이후에는 사도들과 교회에 봉사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항상 기도와 함께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탄원이나 청원을 넘어섭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의 영이 하느님을 향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좋은 기도는 우리가 만들어낸 좋은 언어가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믿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22)하신 말씀 그리고 악령에 들려 죽은 것처럼 보이던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심에 놀라 묻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고 하신 말씀도 기도 안에서 주님 친히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활동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 뜻에 꼭 맞는 기도라면 우리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삼위 하느님의 한 분이신 성령께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주님 뜻에 맞는 천상적인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71)>

 

 원래부터 그런 건 없다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강 선생님은 평소 무뚝뚝한 모습 때문에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편입니다.

 그런 그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서는데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합니다. 그 모습을 본 옆자리 오 선생님이 신기한 듯 말을 건넵니다.

 

  오선생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강선생님: 2학년 5반 찬우있죠?

  오선생님: 그 키 작은 개구쟁이 찬우요?

  강선생님: 수업하고 나오는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오선생님: 그랬어요? 기분 좋았겠네요!

  강선생님: 그럼요! 그 한마디에 피로가 싹 풀렸죠.

  오선생님: 선생님도 찬우에게"고맙다"라고 하셨어요?

  강선생님: 아뇨! 난 원래 그런 말 오글거려서 못해요.

 

   살다 보면 강 선생님처럼 "원래 쑥스러워서 그런 거 잘 못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과 개성이 다를 수 있으니 '원래'부터 잘 안 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원래'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내게 있어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는 선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받을 땐 참 기분 좋은데, 주려고 하니까 원래 그런 걸 잘 못하는 성격이라 어렵다고 한다면 인생은 참 불공평한 게임이 아닐까요?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쑥스러움은 성격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성격은 잘 변하지 않지만, 습관은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라는 말로 모든 변화를 원천 봉쇄하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나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받을 때는 단순하게 받고 줄 때는 복잡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인지를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원래부터'라는 말을 멈추고 '지금부터'라는 말을 꺼내야 할 때입니다. 겨자씨만 한 변화만으로도 하느님은 우리를 어여삐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보리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삶의 노고(勞苦) 앞에서

항상 채워주시는

믿음의 신비.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함께하는 이야기 마당>

'나 홀로 신앙'을 벗어나

 

  얼마 전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가 이런 얘기를 했다. 성당 일에서 벗어나려면 교적을 파는 수밖에 없겠다고, 우스개처럼 흘린 것이겠지만 뼈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성당에서 새로운 봉사자들을 찾지 못해 애태우던 광경을 떠올리다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늘 일하던 사람이 역할만 바뀐 채 또 다른 일을 하게 되니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주일미사나 전례에만 참석할 때는 내가 다니는 성당에 얼마나 많은 분과별 활동과 신심단체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나 홀로 신앙'생활에만 충실해 왔다. 해마다 정성껏 그린 부활달걀과 성탄 미사 때의 우렁찬 성가대 소리가 좋았고, 연초의 말씀 사탕이나 성령강림 축일 은사 뽑기에서는 신기하게도 내게 꼭 맞는 말씀이 담겨 있어 감탄이나 하면서 지내 왔다. 누군가의 수고로 나의 영성이 살찌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올해 초 본당의 성모회 임원직을 맡게 되었다. 평소 여성 총 구역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자들일까 궁금해했을 뿐, 나는 평생 저런 일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 눈에는 어마 어마 하게 큰 일로만 보여져 특별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전입 6개월 차밖에 안 된 내가 그 직분을 맡데 된 건 신앙의 신비였다.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보면 길거리 캐스팅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하느님 일에는 우연이 없으므로 이끄심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다만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성모님의 고백을 따라 해 보았을 뿐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힘들 때도 많이 있겠지만 내 신앙생활의 여정에 있어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평소 신자들이 '1인 1 봉사'를 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반장, 구역장, 분과장, 단장 같은 직책이 아니더라도 반모임에 참석하는 반원으로, 레지오 단원으로, 사회복지 회원으로, 성가대원으로, 자모회원 등으로 본당 활동을 한 가지만 더해 주면 좋겠다. 본당의 열심인 일꾼들이 교적을 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모두가 '나 홀로 신앙'을 벗어나 각자 지닌 재능과 시간을 조금씩만 나누었으면 좋겠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도 작은 것을 내놓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듯이 비울수록 넘치게 채워 주신다는 주님 은총을 성당 일을 하면서 몸소 체험해보는 건 어떨까.

 

-황창연 로사리오/월평동 성당-

 

 

 

아! 어쩌나 "교회와 안보 의식" - 평화신문 홍성남 신부님 -

 

  문: 사석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왜 한국 가톨릭 교회는 안보 불감증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정부에 대해 비판만 하고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 싶어서 침묵으로 응수하였는데 마음이 여전히 불편합니다.

 

  답: 신부님의 곤혹스러움을 알 듯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국가 안보에 별 관심 없다는 말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잘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사방이 강대국이고 더욱이 북한 정권과는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를 가져왔습니다. 안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진 안보 개념은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더 범위가 넓고 미래지향적입니다. 대개 안보라고 하면 많은 분은 공산국가와의 대치 국면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보 논쟁을 체제 논쟁으로 끌어가려고 하고, 체제 이념에 맞지 않는 생각에 대하여는 적대적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안보, 즉 나라 지키는 것은 그런 방법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의 경우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어린아이 때부터 추위에 강해지도록 반바지를 입힌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도자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국민들은 참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소비를 줄이고 검소한 삶을 산다고 합니다. 이런 삶의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단편적으로는 일본인들은 성실하다는 것인데 전체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단편적으로는 일본인들은 성실하다는 것인데 전체적 관점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혹은 전시 체제에서 생존하기 위한 훈련을 일상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아이들은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하고, 부모들은 아이가 공부만 잘하면 싹수가 없어도 성격이 지랄 같아도 다 눈감아줍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사회와 군대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요, 어른들 역시 작은 일에 감정이 폭발하고, 선전지 수준의 지식으로 사회적 문제에 감정적 대응을 하는 등 사회를 정신 분열증적 상태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교회는 대안적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육을 통하여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친밀감과 유대감을 형성하고, 특히 아이들의 경우 단체 활동을 통한 전인교육을 하고자 많은 시도를 하여왔습니다. 국가적으로 가장 기본적 건강성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하고 노력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가져온 병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메카시즘 콤플렉스'입니다.

북한과 연계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하여 국가적으로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부의 잘못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조차 국가 전복 행위로 몰아붙이는 매카시즘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정서적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이득을 주지 않는 상대방을 국가 전복 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야말로 국가안보에 해를 끼치는 병적인 세력입니다.

 

  진정으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결의를 가지게 하려면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반대 세력을 추려내고 털어내는 행위는 결국은 나라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역사 안에서 수많은 나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임을 천명하셨음을 유념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