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아테나와 철갑
르네 앙투안 우아스, 제우스의 머리 속에서 무장한 채 태어난 미네르바, 캔버스에 유채, 135.5 X 190.5cm, 베르사이유와 트리아농 궁
“함부로 친구, 친구 하지 마라. 나한테 친구는 애인도 주는 건데…. 젊으면 싸울 건데, 주려구, 나보다 더 늙은 친구에게.”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보십니까? 삼각관계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을 조화시킬 줄 알고, 외로움 속에서 서로서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늙은 여인들의 지혜가 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기 시작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미네르바, 지혜의 여신이지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테나라고 합니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가 격정과 도취를 사랑하는 광기의 신이라면 제우스의 머리에서 무장한 채 태어난 아테나는 전략을 짜고 목표를 이루는 지혜의 여신입니다. 아버지의 지지를 받으며 논리를 만들고 뛰고 싸우는 그녀는 앞서 나가는 일에, 칭찬받는 일에 익숙한 아버지의 딸, 남자 같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영웅들의 수호신입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벨 수 있었을까요? 헤라클레스가, 이아손이 모두 모험의 여정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영웅들에게는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을 열어주는 수호신인 그녀는 정작 본분을 잊은 자기 여인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고 가혹하기만 한 여신이었습니다. 아시지요? 그녀가 그녀의 신녀인 메두사와 베를 짜던 아라크네에게 어떻게 보복했는지를. 그녀는 그녀의 성전에서 포세이돈과 바람이 난 메두사를 용서하지 않고 메두사의 자랑인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을 온통 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베틀 위에서 아버지 제우스의 애정 행각을 수놓아 제우스를 욕보인 아라크네에게는 스스로 짠 틀 속에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거미가 되게 했습니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런 걸까요?
그녀의 행동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보다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위계를 사랑하는 그녀의 성향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남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남성과의 연애를 좋아하지 않는, 이성적인 그녀는 그녀가 제일 경계하는 ‘감정’으로 치고 올라오며 자기본분을 망각하는 인간을 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철갑을 사랑하고 방패를 사랑하고 칼을 사랑합니다. 잘난 그녀에게, 그녀를 지지해주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 칼에 찔리고 이그러질 것입니다. 아라크네처럼, 메두사처럼.
그런데 자기 사람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며 그들의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건 어쩌면 자기 약점을 허용치 않는 아테나의 경직성이 아닐까요? 자기 분신과도 같은 그들을 벌하는 그 잔인한 행위 속에 그녀가 있고 그녀의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머리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녀는 아버지에게 삼켜진 어머니를 잊고 삽니다. 아테나가 왜 달콤한 사랑에 빠져 생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거라고 말하는 법이 없는지, 왜 쓰다듬고 다독일 줄 모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파울로 코엘료의 <포르토벨로의 마녀> 속 주인공의 이름도 아테나입니다. 작가가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주인공에게 이름을 준다는 건 혼을 부여하는 거지요? <마녀> 속 아테나는 천사와 악마를 부르는 독특한 운명 때문에 자기 삶이 산산조각 납니다. 삶에 끊임없이 돌팔매질을 당하는데도 그녀는 엄살떨지 않습니다. 그녀는 고통을 안으로 삼킬 줄 아는 내성적인 여인이니까요.
고통을 삼켜 안으로 힘을 모으는 그녀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답게 끝까지 싸우지만 그녀의 싸움은 내적 싸움입니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싸움이지요. 전쟁의 신 아레스처럼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싸우는 겁니다. 그녀의 운명은 성스러운 힘이 현현하는 그릇으로서의 자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겁니다. 코엘료의 아테나에는 헤스티아의 모습이 있지요?
어쨌든 <마녀>의 아테나도 엄마를 몰랐습니다. 엄마를 몰랐기 때문에 세상이 사랑으로 넘쳐흐르는 곳이라는 걸 믿지 못했고 미친 듯이 살아왔다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항상 미친 듯이 살아왔어요. 그 모든 것이 내게 공백으로 남아있는 시간들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그 부분 때문에 철저한 공허를 느꼈거든요.”
공허를 공허라 느끼고, 고독을 고독이라 느끼고, 미친 듯 살아온 이유가 공백으로 남아있는 시간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때, 그때 아테나는 그간 자기를 지켜줬던 이성의 철갑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처녀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나이든 아테나를 상상할 수 없지만 이성의 철갑을 벗어버리며 그녀는 나이를 먹을 것입니다. 그간 그녀를 지켜줬던 이성의 철갑을 벗을 때 그녀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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