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내 마음의 별] 상실의 헤데스와 석류
올해로 일흔여덟이 된 엄마가 어느 날 강렬하게 자신을 찾아온 꿈을 펼쳐놓습니다. “꿈에 내가 사막에 서 있는 거야. 햇빛은 쨍쨍한데, 가방도 없고, 돈도 없고. 너희들도 없고,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참 막막했어.”
혼자 가야 하는 길,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길, 그 꿈은 엄마에게 ‘죽음’이 바로 엄마의 화두임을 상기시켜준 거였습니다. 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 만큼의 힘이 조금 생겼기 때문에 꿈이 그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 꿈은 엄마의 신곡입니다. 단테의 <신곡>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생의 절반을 보낸 나는 길을 잃고 홀로 어두운 숲에 서 있었다. 아, 그토록 음산한 숲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어둡고 울창하고 음산한 숲에 단테 홀로 서 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인 그를 가로막는 것은 사나운 표범이고, 피에 굶주린 늑대입니다. 그들에게서 도망치다 사람을 만난 단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먼 옛날에 사람이었다!
먼 옛날에 사람이었던 그 사람, 그가 단테가 시를 배운 시인 베르길리우스입니다. 그를 만나 신곡의 지옥 여행이 시작됩니다. 어두운 숲에서 혹은 사막에서 홀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한 적이 있나요? 지금껏 내가 누려왔던 것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되는 그곳, 거기가 저마다의 신곡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페르세포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1874, 캔버스에 유채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무시무시한 죽음의 왕 하데스에게 두려움 없이 손 내밀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아는 최고의 상실인데.
하데스의 모자를 쓰면 보이지 않지요? 하데스는 페르조나(persona) 없음의 상징입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황망한 존재, 슬픔의 강·분노의 강·망각의 강 너머 아무도 모르는 곳에 고독하게 유폐되어 있는 두려운 괴물, 감히 신이라고 해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저 아득한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는 아마도 상실의 이데아일 것입니다. 그 하데스가 그 검은 에너지로 거침없이 거칠게, 격식도 없이 꽃밭에서 놀고 있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아내를 삼지요?
‘납치’당했다는 것은 페르세포네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사실 상실의 슬픔을 겪겠다고 의지를 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실의 하데스는 언제나 기습적으로 찾아와 피에 굶주린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는 음산한 숲에다 내던지듯 ‘나’를 던져놓습니다. 상실의 쓰나미를 뒤집어쓴 페르세포네는 그 지옥에서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뜻밖에도 달콤한 석류가 있는 거지요?
의외로 페르세포네는 하데스를 싫어한 것 같지 않습니다. 로제티가 그린 페르세포네를 보십시오. 금단의 석류를 먹지 않기 위해 한 손으로 팔목을 잡고 절제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국 달게 먹을 수밖에 없을 만큼 석류는 탐스럽습니다. 시작은 하데스의 납치였지만, 석류를 먹은 것은 페르세포네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림 속의 석류를 보십시오. 이브의 선악과만큼이나 탐스럽고도 먹음직하지요?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자태와 표정을 보십시오. 빨간 속살이 드러나는 석류는 하데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하는 약이 아닙니다.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석류의 맛을 알고 있습니다. 배 속까지 환해지는 달콤한 그 맛을.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에 존재하는 4개월, 대지는 아무것도 꽃피우지 못한다면서요? 하데스의 석류는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페르세포네의 양식, 페르세포네의 마음입니다. 강렬한 꿈을 꾼 엄마는 인생, 정말 짧다고, 자기가 70이 되고 80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때 그 청춘은 참으로 길고 길었는데. 내 열정을 감당하지 못해 내가 나를 치고 상처 냈던 그때 그 시간은 너무나 길어서 끝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지나고 보니 참 덧없지요. 꿈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젊음도 잠시 빌린 것일 뿐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초원의 빛이었고, 꽃의 영광이었던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을 붙들고 있는 거,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내 삶을 빛나게 했던 바로 그것이 집착이 된 겁니다. 집착에 발목이 잡혀 있으면 집착하고 있는 그것이 나를 붙들고 내 인생을 하인 부리듯 부립니다. 내가 놓지 못하는 그것이 나를 휘두르는 겁니다.
석류는 그 집착을 거두게 하는 영혼의 양식 같습니다. 하데스의 석류는 삶은 소유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소로처럼 계절의 변화를 살피는 일만으로도 우리의 할 일은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자, 일 없이도 젊음 없이도 사람 없이도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자기와 잘 지내는 자, 그렇게 늘 평안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주변에 따뜻함을 흘려주는 자, 집착을 벗어버린 그런 영혼이야말로 하데스의 석류의 맛을 아는 자유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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