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디오니소스, 광기의 뿌리

모든 2 2019. 3. 10. 04:40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디오니소스, 광기의 뿌리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라면서요? 사랑하는 사람은 운명을 나눠 가집니다. 디오니소스는 합일의 힘을 아는 사랑의 신입니다.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는 합일의 경지 속에 디오니소스가 있습니다. 황홀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신성, 그 신성을 사랑하는 도취의 신, 그가 디오니소스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젊고 어린 날 죽음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굴곡진 운명 속에서 그의 운명이 만들어집니다. 그와 연결되는 자, 그 비극적 운명을 나눠 가져야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니체의 신이라고도 합니다. 올림포스 12신 중 유일하게 인간 여인에게서 태어난 존재감 없는 신, 그것도 비극의 주인공인 신은 유럽 문명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그 신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는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에게서 우리 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발견했습니다. 말년의 니체의 정신병은 디오니소스를 사랑해서 디오니소스의 비극적 운명을 나눠 가진 자의 필연적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는 테베의 공주 세멜레입니다. 그녀는 바람둥이 제우스의 사랑을 거부하지 못하고 제우스와 사랑에 빠져 디오니소스를 임신합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헤라는 늙은 유모로 변장해서 세멜레에게 의혹을 심습니다. 제우스의 본모습을 본 적이 있는냐고. 사랑한다면 본래의 모습을 봐야 할 것 아니냐고. 제우스와 만나던 날, 사랑에 눈이 먼 제우스가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자, 세멜레는 본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약속'에 발목이 잡힌 제우스는 벼락의 신으로 화했고, 제우스의 본모습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타죽었습니다.

 

귀스타브 모로 ‘제우스와 세멜레’

 

  모로의 그림 ‘제우스와 세멜레’가 재미있는 것은 제우스가 들고 있는 연꽃입니다. 세멜레가 죽어 있는데도 제우스는 연꽃을 들고 있고, 세멜레의 나신은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모로는 사랑으로 죽을 수 있는 상황을 비극으로 보지 않는 것 같지요? 오히려 제우스가 들고 있는 연꽃이 사랑의 절정에서의 죽음이 최상의 복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저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제우스는 무슨 깨달음을 얻은 걸까요? 그의 허벅지에서 생을 보존한 디오니소스가 그에게는 연꽃이었나 봅니다. 디오니소스는 최고의 권력자 제우스에게는 낯설기만 한 ‘모성’을 일깨워준 독특한 아들이었으니까요. 제우스의 벼락으로 어머니를 잃었으나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다시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그 신성한 벼락 덕택에 신성을 얻습니다. 디오니소스란 이름은 두 번 태어난 자란 뜻입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나가 자연스럽게 지혜의 신이 된 것처럼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충동의 신, 광기의 신이 됩니다.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해 디오니소스를 세멜레 언니 부부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모 부부가 미쳐서 디오니소스를 죽이려 했습니다. 헤라의 계략인 거지요. 디오니소스가 광기의 신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자애롭고 깊은 사랑의 손에 이끌려 서로 쓰다듬고 다독이는 삶을 배워야 할 시기에 엄마를 빼앗기고 엄마 노릇을 하는 사람이 공격해대는 그런 삶의 허방을 만나 피를 철철 흘려야 했으니. 자기 십자가에 끌려다니며 미친 채로 방랑해야 했던 디오니소스가 그 고통 속에서 본 것은 일자(一者)였습니다. 

 

  살면서 디오니소스처럼 자신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총 맞은 것처럼 심장이 아파본 적이. 심장처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까마득하게 찾아드는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내가 나를 다시 한 번 짓밟으며 삶의 감옥에서 무력하게 스스로를 태워본 적이. 사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해 집착으로 남은 사랑이 나를 지옥의 불로 던져 넣은 적이. 미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미친 채로 떠돌아다닌 적이. 


  디오니소스는 그런 운명의 박해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거기서 그 고통의 에너지를 축복으로 바꿔내는 존재입니다. 그는 미칠 수밖에 없는 지옥불의 시간을 거치면서 누구보다도 고통을 잘 통과하는 방법을 알아낸 신이었습니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지요? 자기 십자가에 끌려다니면서 고통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으면 십자가와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내재신이 존재합니다. 그 내재신은 살면서 ‘나’를 삼킨 고통을 바라보고 관조하는 일자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파고가 일어나 디오니소스의 몸을 찢듯 내 마음을 찢고 나를 파괴하고 있을 때 드라마를 보듯, 남의 이야기를 듣듯 거리를 두고 고통의 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경험 너머에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언가에 도달하는 길 위에 있습니다. 부활한 디오니소스와 동행하는 거지요. 그러면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최악의 순간을 아는 최고의 순간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나는 그 최고의 순간까지도 툭툭 털어낼 줄 아는 인생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