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헤라는 왜 제우스를 떠나지 못했나

모든 2 2019. 3. 10. 04:18

 

[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헤라는 왜 제우스를 떠나지 못했나

 

  남편은 아내의 울타리고, 아내는 남편의 울타리입니다. 아내를 보면 남편의 여성성이 보이고, 남편을 보면 아내의 남성성이 보입니다. 아내에게서 남편이 보이지 않고 남편에게서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부부관계가 이상한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거나 서로를 버린 거지요.

 

  제우스와 헤라, 이상한 커플입니다. 왜 헤라는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에 시커멓게 속을 썩으면서도 제우스를 떠나지 못하는 걸까요? 헤라는 누구보다도 가부장적 틀에 길들여진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곳곳에서 가부장적인 틀을 많이 벗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틀이 강력하게 작동되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재벌일 것입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 그 구조 속에서 그는 선악의 규정을 받지 않습니다. 그가 선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는 하늘의 지배권을 가진 제우스를 떠올립니다. 그렇게 바람을 피워대도 제우스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 그것은 그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가부장 사회에서 힘이 있는 남편의 바람기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제우스 같은 남편이 바람나 바깥으로 나돌 때 여인들이 취하는 전략을 보면 그 여인의 내면에 어떤 여신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 친구는 남편이 바람난 사실을 안 그날, 아이만 챙기고 집에서 남편을 내보냈습니다. 그 친구의 마음속엔 대지의 여신 데미테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위해서는 지옥 끝까지 가는 엄마, 아내로 사는 것은 포기해도 엄마로서 사는 것은 포기하지 못하는 모성의 여인인 거지요. 반면 남편도, 자식도, 그 여인도 문제 삼지 않고 모든 것을 떨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내면에 불의 여신 헤스티아가 살고 있는 여인입니다. 

 

  헤라는 어떨까요? 헤라는 결혼의 여신입니다. 그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조강지처의 상징입니다. 조강지처의 상징답게 헤라는 위풍당당합니다. 저 그림은 렘브란트의 ‘헤라’입니다. 렘브란트는 정말 헤라를 위풍당당하게 그렸지요? 그런데 렘브란트가 저 그림을 그린 맥락을 알고 보면 짠합니다.

 

  렘브란트는 부유한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으로 많은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에는 단서조항이 있었습니다. 렘브란트가 재혼할 경우에는 더 이상 유산을 사용할 수 없고 유산을 아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 쓰는 것을 좋아하고 돈 없이 사는 법에 익숙하지 않은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여인 헨드리케가 있었으나 정식으로 결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함께 사는 일이 죄가 되어 버린 거지요. 그녀는 결국 17세기 무시무시했던 교회법에 의해 ‘간통’으로 규정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습니다. 자존심까지 난도질당하며 렘브란트 곁에서 죽어간 헨드리케를 보며 렘브란트는 현실에서는 해줄 수 없었던 일을 해주었습니다. 바로 그녀를 결혼의 여신으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헤라의 얼굴에 이미 세상을 뜬 그녀의 얼굴을 입힌 거지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렘브란트 ‘헤라’ 1662~1665년. 캔버스에 유채, 107.5×127㎝, 해머박물관 


  그나저나 바람둥이 제우스는 왜 헤라와 ‘결혼’이란 것을 했을까요? 결혼의 룰을 지키지도 않고 지킬 마음도 없었으면서 말입니다. 그의 여성편력상 차라리 독신이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제우스가 다른 여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헤라의 매력에 빠져 정신없이 연애하자고 달려들었을 때, 그때 헤라는 연애의 조건으로 ‘결혼’을 내걸었습니다. 정돈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그녀답지 않습니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권리입니다. 아프로디테가 자기 열정에 충실한 여신이라면 헤라는 자기 권리에 충실한 여신인 거지요. 

 

  헤라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식보다도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잘 풀리면 헤라 여인은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삶은 늘 꿈을 배반하는 것이어서 아시다시피 헤라는 결혼으로도 정돈된 삶을 얻지 못합니다. 남편이 그녀를 옆에 둔 채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들이대니까요. 그때마다 헤라가 자기 권리로 할 수 있는 일은 분노를 품어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헤라의 분노는 왜 마음을 잡지 못하는 남편 제우스에게 직접적으로 향하지 않을까요? 이상하지 않나요? 바람은 남편이 피웠는데 왜 헤라는 제우스를 잡지 않고 제우스의 여인들을, 제우스의 자식들을 잡으려고만 할까요? 그것이 헤라입니다. 헤라에게 죄인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여인들이고 그녀들이 낳으려고 하는 남편의 아이들이어서 헤라는 그들을 응징합니다. 권력을 좋아하고 위계질서를 좋아하는 헤라는 권력이 나오는 원천인 남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삐걱거릴 때 내가 심통을 부리고 싶은 상대가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주변이라면 내 속에서 헤라가 놀고 있는 겁니다. 그때 헤라를 제대로 달래주지 않으면 너그러움을 잃고 유연성을 잃어버린 헤라가 우리의 삶을 뻣뻣하고 경직되게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