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 내 마음의 별]헤파이스토스의 분노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는 거침없는 성격이라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명력의 표본 같습니다. 그 둘이 사랑을 했습니다. 열정 많고, 분노 많고, 눈치를 모르는 커플의 결합이니 얼마나 격정적이었을까요? 밖은 이미 환한데도 전쟁의 신은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진작 일어나 단장을 하고 있고, 전쟁의 신의 무기는 이미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저 그림을 통해 보티첼리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랑은 본디 전쟁의 신마저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거침없는 욕망이란 것이었을까요?
사랑한다면 저들처럼 해야 할까요? 그런데 저 상황을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마누라가 용서할 수 없는 못된 놈과 바람이 난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 아닙니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추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최고의 보물이었겠습니다. 보물이 손을 탄 것입니다. 당연히 헤파이스토스의 분노는 하늘을 찌릅니다.
당신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사랑에 자신을 던진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편을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며 분노하는 헤파이스토스 편을 드시겠습니까?
어쨌든 헤파이스토스가 분노하여 신들을 소환했을 때 신들이 그의 편을 들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모양 빠지는 신이었는지를 증명해 줍니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아시지요? 그는 올림포스 열두 신 중에 유일하게 일하는 신입니다. 어머니 헤라를 위해 황금의자를 만들고 아버지 제우스를 위해 벼락을 만들고 그렇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뭔가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할 때 사랑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기를 쓰는 인물의 안타까움이 헤파이스토스에게 있습니다. 거기에 그의 몸과 마음이 비틀린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요?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와 마르스’, 약 1485년, 포플러에 템페라와 유채, 69.2×173.4㎝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반지 끼워주게 되는 손가락이 있고, 자꾸만 깨물게 되는 손가락이 있지 않나요? ‘나’의 면류관인 자식이 있고, ‘나’의 그림자인 자식이 있습니다.
아폴론과 헤르메스가 제우스의 면류관이라면,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는 제우스 분노의 하수구였습니다. 제우스는 왜 그렇게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를 미워했을까요?
아들을 미워하고 못마땅해하는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공부를 못한다고, 대든다고, 놀기만 한다고, 모자란다고. 소심하다고, 사고만 친다고. 그런 아버지일수록 정작 아들을 모릅니다. 아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슨 꿈을 꾸는지, 어디서 좌절하며 어디서 울고 싶어 하는지. 어떤 친구들과 사귀며 왜 그런 친구들과 사귀는지.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와 자기 돈으로 살아가는 자식을 가끔 ‘성적’으로나 점검하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에게 훈계한답시고 화를 내며 그것을 사랑이라 여기는 아버지라면, 그런 아버지가 잘나가는 아버지일수록 아버지의 그늘이 품어내는 기대와 분노에 아들은 질식합니다. 아버지 때문에 불행한 아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훈계에 반응한다기보다 그림자에 반응합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다기보다 부모의 행동에 부응합니다. 부모의 바람에 따라 성장하지 않고, 부모가 자식을 향해 품어내는 정서적 울타리에서 성장합니다.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의 정서가 분노인 것은 절대적으로 아버지 제우스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은 나의 것이어서 언제까지나 어머니, 아버지 탓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탓하고 싶은 그것이 바로 나를 낳은 부모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안의 상처를 돌보고 살 수 있고, 그래야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는 고백에 힘이 붙습니다.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 당연히 분노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릅니다. 아레스는 자기 안의 분노를 바깥세상으로 분출하는 방식입니다. 왜 사랑을 해도 전쟁 같은 사랑을 하고, 늘 막장 드라마를 만들며 존재감을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그가 있는 곳에 언제나 분쟁이 있고 전쟁이 있는, 아레스 같은 사람입니다. 상처를 확대 재생산하는 사람인 거지요. 반면 헤파이스토스는 자기 안의 분노 에너지를 창조적인 작업으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올림포스 열두 신에 이름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올림포스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던 헤파이스토스가 좋아했던 곳, 그를 진정시켰던 편안한 곳은 바로 대장간이었습니다. 담금질을 해야 하는 대장장이의 신으로서 불은 중요하지만 그 불은 정화의 불이라기보다 분노의 불입니다. 스스로 되는 일이 없다고 믿는 자의 분노 말입니다. 대장간은 헤파이스토스가 그 불을 다스려야 하는 곳입니다. 헤파이스토스가 로마에 가면 불카누스(vulcanus)입니다. 라틴어 불카누스는 땅속의 불(vulcano)에서 왔습니다. 심화(心火)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헤파이스토스는 자기만의 대장간에서 뭔가를 만들며 그 불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꾼 존재입니다. 그는 뭐든 잘 만들었습니다. 포세이돈의 삼지창도, 하데스의 보이지 않게 만들어주는 투구도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최고의 것들이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그 유용성보다는 대장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불을 살피고 담금질을 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속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삶이 붕괴되는 느낌일 때가 있지요? 그때는 내 마음속 헤파이스토스에게 올림포스가 아니라 대장간으로 가는 길을 물어야 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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