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

[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불의 여신 ‘헤스티아’

모든 2 2019. 3. 9. 17:32

 

[이주향의 신화,내마음의 별] 불의 여신 '헤스티아'

 

  신화가 허구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80년대 대학가가 그랬습니다. 교수나 친구가 “그건 신화야”라고 말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토론이 불가능했습니다. 철저하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언어철학, 분석철학, 심리철학은 신화를 먼먼 옛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무지한 세계관쯤으로 치부하고 무시했습니다.

 

  하긴 20세기 전반 최고의 분석철학자 러셀의 꿈이 애매모호한 일상언어를 참 거짓이 분명한 이성언어, 수학언어로 바꾸는 것이었으니 말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러셀을 이으며 새로운 전통을 만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며 말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그 명제로서 그는 신화의 영역, 종교의 영역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했지만 그 존중은 침묵 속에 봉인된 것이었을 뿐 현실로 걸어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화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이는 고 이윤기 선생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뒤 세대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해도 신화가 단순한 허구는 아니라는 사실에는 모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근 20년간 융과 니체에 빠져 살면서 나는 신화가 우리의 탯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신화는 미신이 아니라 생각의 뿌리이며, 허구가 아니라 인식의 기원입니다. 거기엔 삶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원형적 시각이 들어 있습니다. 신화는 고해 같은 바다를 항해하느라 정신 놓고 사는 우리의 북극성이며, 길을 잃고 혼돈 속을 헤매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몇 달 전 나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화덕 앞의 여인, 그녀가 헤스티아라고 합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를 만나는 시간은 헤스티아의 시간이라고. 헤스티아에서 답을 찾으라고. 그때까지 나는 헤스티아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올림포스 열두 신에 그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헤스티아는 존재감이 없는 여신입니다. 올림포스 열두 신 중에 그녀만큼 존재감이 없는 신도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에게 아예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버린 존재니까요. 그녀는 트로이 전쟁으로 신들이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우며 분주했을 때도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혼자 남아 불을 지키고 있던 불의 여신입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그녀를 좋아했고, 태양의 신 아폴론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녀는 그들과 삶이 얽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끝내 혼자였습니다. 아폴론의 지성으로도, 포세이돈의 감성으로도 유혹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그녀 속에 있었나 봅니다.

 

조르주 드 라 투르 ‘막달레나’ 550×767 루브르 박물관, 파리

  많은 화가들이 올림포스의 신들을 그렸으나 헤스티아를 그린 화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존재감이 없어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자존감이 충만한 모양이지요? 그나저나 그 자존감은 어디서 생긴 걸까요?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불입니다. 불은 마음의 심지일 것입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안으로, 내면으로 거둬들이는 시간, 그 시간이 그녀의 자존감이 생기는 시간일 것입니다. 

 

  헤스티아는 제우스의 누이입니다. 그녀는 아버지 크로노스가 제일 먼저 삼킨 딸이고, 제일 나중에 토해낸 딸입니다. 당연히 그녀는 아버지의 딸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이고,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딸입니다. 그만큼 상처받은 딸이고 그만큼 아버지를 아는 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녀가 남자와 살지 않는 건 바로 이 아버지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콤플렉스가 뭐지요? 콤플렉스는 단순한 열등감이나 단점이 아닙니다. 융 심리분석가인 데릴 샤프에 따르면 콤플렉스란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특정한 이미지에 달라붙어 있는 감정과 생각들입니다. 그 콤플렉스는 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무의식 속에는 무엇이 살고 있는지요? 무엇이 살아서 당신의 삶의 무늬를 만들고 있나요? 당신의 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당신만의 삶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틀, 그것이 콤플렉스입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격렬한 사랑에 빠지고 나서 치명적으로 상처받은 적이 없으십니까? 갑자기 올라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어놓고 후회한 적이 없으십니까? 마음의 중심에 불안을 모셔놓고 인생은 원래 불안한 거라며, 하이데거도 그랬다며 실체 없는 불안에 자신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당신 속에 사는 당신의 콤플렉스가 당신으로 하여금 격정의 춤을 추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던 격정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집착이거나, 질투가 만들어내는 분노거나, 기대가 만들어내는 원망이거나, 우울이 만들어내는 억압이거나! 그런 부정적인 정서들이 만들어내는 격한 삶의 춤을 추는 한 우리는 언제나 허기에 시달립니다. 아시지요?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헤스티아는 아버지의 배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딸이라고 했지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나 아버지에게 짓눌린 딸은 불의 정화를 통해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야 가까운 이의 따뜻한 누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겨울날 집 안을 살리는 화덕 같은 누이입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은 자식을 가둔 것이라고. 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나서 그녀는 비로소 사랑받으려는 집착에서 벗어났겠지요.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가시지 않는 갈등이 실은 내 콤플렉스가 만들어내는 환상임을 알게 되는 날,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문세가 부르는 ‘옛사랑’의 노랫말처럼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두고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