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2018년 7월 15일(나해)

모든 2 2018. 7. 15. 23:00

 

규암성당 신축 기공식(1965년 3월19일)

규암본당은 금사리본당 몰리마르 요셉 신부의 유언에 따라 6.25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에 설립되었다. 전쟁 중에 순교한 신부님을 기리며 요셉 축일에 기공식을 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  마르코 복음 6,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 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룰러라. 또한 어느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그곳을 떠날 때에 그드레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말씀의 향기>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강승수 요셉 가톨릭 농민회 담당

 

  누가 나더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라고 하겠다. 이 문장은 회칙의 3항부터 6항까지의 작은 제목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각성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전쟁'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다. 총을 쏘고 폭탄을 터트려 생명을 살상하는 것이 전쟁이다. 이 전쟁도 무조건 막아내야 하지만,지금 산과 들에서 사람들이 벌레와 뭇생명들을 향하여 벌이는 전쟁도 멈추어야 한다.

  작물을 키우거나 나무를 돌보면서 제초제 또는 살충제를 뿌린다. 풀을 고사시켜 버리고 벌레를 '대량 살상'하는 것이다. 사람만 살고 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일견 밭에나 들에다가 뿌리는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 입에다가 뿌리는 것이 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안면도 성당 한 켠에 산란용 닭을 150마리 정도 키웠다. 겨울에는 닭모이를 얻어 먹으러 들쥐들이 모여든다. 모이만 좀 먹고 갈 것이지 자루를 다 뚫어 놓고 똥싸고 어지럽히는 것이 싫어서 알사탕 닮은 '쥐싹'이라는 약을 쥐구멍 앞에 놨더니 가지고 들어가 일가족이 먹고 한동안 곳간이 조용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닭장청소를 하다가 구더기의 밥이 되어 있는 서생원의 사체를 발견하여 치우려고 하는 순간,먹이를 찾아 주위를 거닐던 닭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쥐고기 속에서 고물고물 유영하던 구더기들을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퍼뜩 든 생각이 있었으니 '아,내가 쥐약을 먹고 있구나!' 내가 던져 놨던 쥐약을 먹은 쥐를 구더기가 먹고,그 구더기를 닭이 먹고,그 닭이 낳은 알을 내가 먹고 있으니 결국은 내가 쥐약을 먹고 있는 셈인 것이다.

 

  농약을 산에 들에 뿌리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우리 입에다가 뿌리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톨릭농민회 친환경 유기농사를 짓는 분들은 벌레와 풀을 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요 내 생명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임을 아는 분들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via의 시선(어떻게 살까?)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늦은 저녁,열심히 달립니다. 살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들기 위해서 달립니다. 서향으로 지어진 사제관,햇님이 지닌 힘을 몸으로 깨닫습니다. 잘 달궈진 방 안에서 쉬려면 밖의 계절과 단절된 방 안의 계절을 조성하거나 땀으로 지친 몸을 시원한 물로 씻어내고 가급적 빨리 침대에 누워야 합니다.

 

  작년도 더웠던 것 같습니다. 작년 여름에도 저녁 쉼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맞이한 겨울,이제는 추위를 견뎌내는 것이 쉼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웠던 여름이 추억이 되고 그리고 다시 지금 경험하는 여름은 견뎌내야 하는 현실이 됩니다.

 

  매년 반복하며 삽니다. 그러고 보면 더 더워진 여름과 더 추워진 겨울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에어컨을 켜고 보일러를 빵빵하게 돌리면 여름에 긴팔을 입고 겨울에 반팔을 입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특히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보다 부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부유한 삶을 사는 제가 더 큰 편안함을 위해 더 더운 여름과 더 추운 겨울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것에 대해서 저의 가슴과 머리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견딜 수 있는 만큼 견뎌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죽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만납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 줄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내가 주겠다는 생각이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폭염경보가 울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든 세상입니다. 내가 선택한 삶이 만들어낸 폭염,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지금 기억해야 할 것은 미래 세대가 경험하는 여름이 오늘과 다른 여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불리우는가?

 

  우리는 때로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첫 번째 이름은 부모님이 주십니다. 사랑스러운 아기를 바라보며 엄마 아빠가 도전하는 첫 번째 미션이 바로 '작명'일 것입니다.

 

  작명의 방법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이름을 짓는 부모님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아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아이가 약한 걸 걱정한 부모님이 아이 이름에 장수를 상징하는 모든 걸 길게 이어 붙여 작명하는 코미디를 보고 배꼽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 긴 이름이 우습긴 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부모님 마음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부모님 다음으로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 준 사람들은 바로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은 매우 기발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별명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 줍니다.

 

  부모님은 작명할 때 우리의 행복을 기도하지만,친구들은 별명을 지을 때 우리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별명은 친구끼리 통하는 우정의 암호가 됩니다.

 

  천주교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부모님이 주신 이름과 친구들이 지어 준 별명 말고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이름 뒤에 붙는 세례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례명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든든한 지팡이와도 같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약해진 마음으로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우리는 그 이름을 떠올리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합니다.

 

  부모님께서 주신 이름을 생각하며 감사함을,친구들이 지어 준 별명을 떠올리며 웃음을,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세례명을 마음에 새기며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어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우리는 음식을 먹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음식은 그냥

생겨나지 않습니다.

쌀,채소,과일

그것을 가꾸는

농민(農民)입니다.

 

먼 후일 우리는

구걸하지 않으려면

오늘,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