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2018년 7월 1일(나해)

모든 2 2018. 7. 1. 22:30

 

01. 논산본당의 복사들(1962년 2월2일)

주임 성재덕 베드로 신부와 복사 아이들이 새 성당에서 복사 옷을 갖춰 입고 찍었다. 성 신부가 프랑스로 휴가를 떠나기 전 기념으로 촬영한 듯하다. 사진을 처음 '찍히는'아이들의 긴장감과 익살스러움이 나타나 있다.(사진제공: 성가소비녀회)

 

  +  마르코 복음 5,21-43

 

  <소녀야,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였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을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

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탈리타 쿰!"이는 번역하면 '소녀야,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말씀의 향기>

 

  '버리는' 문화를 지양하며  - 원유진 아드리아노 도안동 주임-

 

  오늘은 연중 제 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가도록 기도하려면 그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어떤 지향을 두고 있는지 알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교회의 첫 번째 권고인 '복음의 기쁨'을 통해 그분의 지향을 조금이나마 알고자 합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분명한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주가 지수가 조그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이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되면서 힘없는 이는 힘센 자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자리도,희망도,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습니다.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버리는'문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단순히 착취와 억압 현상이 아니라,전혀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53항-

  경제가 좋아져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교황은 그 안에 만연되어 있는 '버리는'문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인간 존재 자체를 얼마만큼의 쓸모가 있는지로 나누고 가르는 일이 '버리는'문화를 가중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버려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실천적 행동을 수행하는 교회와 신앙인이 될 것인지,아니면 그런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안위와 업적을 위해 '버리는' 문화를 살아가는 교회와 신앙인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을 '버리는'문화를 만들어 내는 시대적 위기에,현재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며,창조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보존하고 키우는 일에 참여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실천적 결심들을 정해 보는 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via의 시선(어디를 걸을까)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밥상머리에서 벽면에 걸려 있는 달력을 봅니다. 1년 중 반을 살았습니다. 2018년 시작부터 추위와 난방비 사이에서 고민했는데,이제 더위와 냉방비 사이를 줄타기를 하고 있습닌다. 참 편리한 세상입니다. 창밖의 세상과 다른 생활이 가능한 세상,그것도 리모컨 하나로 모든 것이 조종됩니다. 뜨거운 여름을 시원한 가을로 변환시키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주 걷습니다. 그러나 걷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곳이 있습니다. 소위 번화가라는 곳입니다. 사람도 많고,차도 많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몸의 감각을 깨우는 음악들 그리고 밝은 조명 아래 질퍼렇게 먹고 마시는 술판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일정 이상의 돈을 지급해야만 먹고 마시는 권리가 주어지는 곳,눈과 귀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그런 곳은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공기의 질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그곳에 가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그러나 특정한 시간이 되면 사람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아! 그러고 보면 번화가라는 말은,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주 공간이 아닌 지나쳐 가는 공간,그래서 그곳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돈이 행위의 기준을 결정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그래서 배려 혹은 나눔,질서와 절제라는 가치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룡역에서 갈마동까지 걸었습니다. 조금 늦은 밤,천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적당한 소음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북적이지 않습니다. 걷기에 좋을 만큼 지나쳐 가는 사람들,그래서일까,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걷는 길 옆으로 서 있는 나무들과 건물들의 명칭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곳이, 이 길 옆에 있었구나!" 다음에는 어디를 걸어볼까.버스를 타야겠습니다. 너무 화려하지 않고,밤이 존재하는 번잡하지 않는 곳으로 가야겠습니다.

 

 

행복의 시작점

 

  세상 모든 일에는 시작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뿐,시작점 없이 비롯된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요? 그 시작점에는 어떤 일들이 공통적으로 벌어지게 되는 걸까요?

 

  행복의 시작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에 끝이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비롯됩니다.

 

  슬플 때 끝도 없이 그 슬픔이 계속될 거라면 그 고통을 인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언젠가 끝나리라는 믿음이 힘겹지만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게 합니다.

 

  기쁨도 그 끝이 있기에 오히려 한층 더 부피가 커집니다. 끝도 없이 계속될 기쁨이라면 그것은 처음부터 기쁨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끝나는 지점을 예측하는 것은 불안과 허무의 벽을 미리 보는 것이 아니라,평온함을 보장해 주는 소중한 보호막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단거리 육상선수가 출발선에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끝 지점이 코앞에 보이기 때문이고,마라톤 선수가 거친 호흡을 견디는 것은 그 먼 길 어딘가에 끝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시작할 때 끝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행복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일 년의 반이 지나고 이제 나머지 반이 시작되는 첫날,7월 1일. 오늘이 행복의 시작점이 되려면 내 안에 있는 기쁨과 슬픔 모두에게 그 끝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것이 하루하루를 일희일비하며 살지 않고 평화 안에서 살아가는 지혜의 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어쩌나

내민 손이

무색해지면

그마음 헛헛하여

 

행여

불어오는 바람

한 가닥 손끝에

스치기를 바라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