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18년 6월 24일(나해)

모든 2 2018. 6. 24. 22:30

 

 

성연성당(서산지구)

본당 설립: 2017.11.17. 주보 성인: F,하비에르

 

 

 

  +  루카 복음 57-66.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하며,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말씀의 향기>

 

  한반도! 평화를 빕니다!!   -박제준 토마 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장

 

  한국천주교회는 매년 6월 25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68번째 6.25를 맞이하는 올해,우리나라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었고, 이어서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이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나아가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하기를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평창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때 몇몇 신부님들이 저를 격려해 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민화위원장님,이제 바빠지겠어요,"민화위원장,북한 언제 가? 갈 때 나도 데려가 줘,"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을 때와 달리,이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질 것 같아서 행복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중에 "평화를 빕니다.'라는 말이 유난히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우리가 이제 진심으로 평화를 빌어줄 수 있게 되었구나.' '하지만 지난 분단의 시간 동안 우리 안에 어려움도 꽤 많았을 텐데..' '우리 사회 안에도 하나하나 용서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하겠구나.'

 

  남북 분단이 가져온 손실들을 "분단비용"이라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겠지만,그 보다 더 큰 손실은 사회적인 부분입니다. 좌우를 나누고,빨간색을 칠해서 폭력을 행사해 왔던 시간들은 우리를 올바로 배우지 못하게 하고,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대화하고 협력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미사 때는 분단으로 나누지 못했던 진정한 평화의 인사를 나눠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나누기에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6월 25일(월) 저녁 7시 30분 '한반도 평화기원미사"가 주교좌 대흥동성당에서 있습니다. 평화기원미사에 함께해 주시고,우리 안의 분단과 단절을 극복하는 은총을 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via의 시선(사제의 마음???)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사제의 마음은 예수 마음~~~",빨리 노래가 끝났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노래 가사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이런 노래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의도로 만든 노래인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성실과 순종으로 가득 채워진 일상 속에서,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면서도,충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닌 채, 돌아온 탕자의 형의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해본 적이 없이-이른 아침부터 나에게 주어진 아니 의무지어졌다고 생각한 일을 하고 지냅니다. 일은 철저하게 처리합니다. 그리고 처리한 만큼의 결과를 맺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기쁘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합니다. 그런데 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 '그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주어진 그 일을 할 때,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합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나에게 일을 부여한,그 누구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을 통해서,일을 잘 수행하기 위한 수단과 기술을 배웁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나는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선택을 하며 지냅니다. '하루'라는 시공간 안에서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나'입니다. 지금의 나는 '완성된 나'이지만 '고정된 나'는 아닙니다. 잠시 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될 것입니다. 수많은 선택으로 형성되는 나는 사제라는 명패를 내세우고 예수를 추종합니다. 충실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가슴에 품어야만 가능합니다. 끊임없는 되새김질을 통한 체화 그래서 닮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이어짐입니다. 닮음의 과정 속에서,충실한 종이 되기 보다는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경험된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사랑받는 자녀로 경험된 내가 수행하는 일은,더 이상 주어진 그 누구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일은 내 자신의 일이며,내가 수행하는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제의 마음은 예수의 마음". 아닙니다. 다만 예수의 마음을 가슴에 담으려는 선택을 할 뿐입니다.

 

 

 

 

마음 조각 모음

 

 

 

 

 

  살다 보면 가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순간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심심해서 아무 책이나 우연히 펼쳤는데 어떤 문구 하나가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순간.

  평소 잘 듣지 않던 라디오를 켜자 때마침 진행자의 멘트 한 줄이 유독 크게 들리는 순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무심코 툭 던진 한마디가 자꾸만 입가에 맴도는 순간.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바라본 바깥 풍경이 여느 때와 달리 매우 낯설게 보여지는 순간.

 

  짧지만 불현듯 어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합니다. 진실은 오랜 동안의 교육이나 수련에 의해서도 깨달을 수 있지만,어쩌면 우리 일상에서 순간순간 그 모습을 오히려 더 자주 드러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내 것이면서도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오직 일상에서 마주하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구나 친구의 말 한마디가 유독 섬광처럼 빛날 때,평소 지나쳤던 풍경 안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그 순간 속에서 드러난 진실의 조각을 단단히 잡아 두어야 합니다. 그 조각들 안에 바로 내 마음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마음의 조각을 모으는 시간입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면 흩어졌던 일상의 순간들이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서서히 완성됩니다. 기도할 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가슴에

말씀만이

남아 있었다.

 

그후

우리의 마음에

생명의 싹이 돋았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