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연중 제10주일 2018년 6월 10일(나해)

모든 2 2018. 6. 10. 22:30

황무실 성지

황무실 교구 초기 공동체 중의 하나로 황무실 인근에서 살다 1793년 1월 28일 홍주옥에서 동사형(凍死形)으로 순교한 복자 원시장 베드로,1799년에 홍주 형장에서 참수 순교한 복자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은 장렬한 순교를 통해 교구 초기 공동체에 영적 영감과 감화를 주었다. 그 후 신유박해,기해박해,병인박해,무진박해 등 내포 전역을 휩쓴 무서운 박해 중에도 황무실 신앙 공동체는 계속 보존되었다.

문의 : (041)362-5947) 신합덕성당

 

  +  마르코 복음 3,20-35

 

  <사탄은 끝장이 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어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말씀의 향기>

 

  주님의 크신 자비   -김지성 바오로 괴정동 주임-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중에 특히 사람은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닮은 존재,하느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원조들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한 마음에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불순명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 죄로 인해 원조들은 하느님을 피해 숨으며 하느님과 단절되었고, 자신들의 몸을 가리며,상대에게 자신의 죄를 떠넘기며 서로 간의 일치도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주신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남용하여 당신을 배반하였지만,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여자의 후선을 통해 악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곧 첫 번째 복음(原福音)을 선포하십니다. 원조들의 죄를 단죄하시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닫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하심을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희망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마침내 하느님의 아드님이자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교만과 불순명의 죄를 통해서 인간을 지배한 악의 세력은 이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무너지고,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새로운 다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표현대로 지금까지는 "힘센 자"인 악의 세력이 인간을 지배했지만,이제는 "더 힘센 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묶어 놓고서,그 집에 들어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태초에 첫 원조들를 유혹했던 악의 세력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보면서도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기보다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중상모략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활동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사회의 지도자들이나 집안사람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위협을 당해도 예수님은 끝까지 구원의 길을 가십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예수님의 활동을 막을 수 없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거두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도 종종 악의 유혹에 넘어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주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설령 죄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포기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via의 시선(내가 채우는 하늘)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8월의 뜨거움을 경험하게 하는 6월입니다.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지요. 아침, 미사 전에 만나는 신자분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안녕하세요"어제의 바라봄이 오늘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만남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차를 이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교통수단,제일 좋은 것은 뚜벅뚜벅 걸을 수 있는 두발입니다. 튼튼한 심장과 긴 호흡을 할 수 있는 폐가 있으면 언제든지 이동가능합니다. 물론 거처에서 떠나기 전에 경험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합니다.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출입문 옆에 걸려 있는 차 열쇠를 향해 손을 내밀 것을 요구하는 또 다른 욕구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시원합니다. 안과 밖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거리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창문 사이의 안과 밖이 마치 천국과 연옥처럼 느껴집니다. 반팔 위에 긴옷을 덮씌워야 견딜 수 있는 안의 시원함과 뜨거움의 빛을 피하려 나무그늘 아래를 파고 드는 창밖의 세상. 안을 더욱 차갑게 하기 위해서 밖을 더 덥게 만들어야 합니다. 편안함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편함이 댓가로 지불되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누리는 만족,계속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능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안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 안에서의 시원함을 느꼈던 크기만큼 밖의 뜨거움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내가 안에서 누렸던 안락만큼 밖의 상태는 더 나빠집니다. 그리고 나는 더 나빠진 밖에서 걸어야 합니다.

 

  하늘이라는 지붕을 안고 삽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땅위를 기어다니는 이름 모를 저 생명의 하늘은 어디일까? 성당 수녀원 마당에 키우는 호순이의 하늘은 어디일까? 휏대 위에 올라가 숫컷의 위용을 뽐내는 저 장닭의 하늘은 어디일까? 하늘을 나는 새들의 하늘은 어디일까?

 

  손을 뻗어 하늘을 만져보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하늘은 보고 느끼는 것이지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 자신의 하늘에 무엇인가를 채워나갑니다. 그리고 내가 채우는 하늘의 상태는 내가 살아야 하는 내일의 상태를 알려줍니다.

 

  내가 채우는 하늘의 상태 곧 나는 어떤 하늘을 만들고 있을까? 숨쉬고 움직이며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는 하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안의 시원함을 위해서 밖을 더 힘들게 만드는 그래서 안의 즐거움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요즘 부쩍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업에 들어가면 어떨 때에는 거의 반 정도의 학생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마스크만 쓰면 다행인데, 거기에다 모자까지 눌러 쓰고 있으면,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아 한참을 지켜봐야 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에 걸린 학생들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감기로 인해 마스크를 쓰는 학생들은 적었습니다.

 

  감기가 아니면 미세먼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세먼지가 없는 날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한 학생들이 많은 걸 보니 그것도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감기나 미세먼지가 아니라,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는 학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잠도 못자며 해야 할 일은 늘 많고,학업에 매달리랴 아르바이트도 하랴 결국 시간에 쫓겨 화장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은 마스크였습니다.

 

  물론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건 모두의 욕망일 것입니다. 하지만,때때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마주해도 불편하지 않은 사회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과 사람은 꾸밈없는 눈동자와 치장되지 않은 미소를 만날 때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 마음까지 가려질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됩니다.

 

  감기가 걸렸거나 미세먼지가 심할 때를 제외하고,일상의 나날들 속에서 마스크 없이 민낯의 자유로움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하루를 꿈꿔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유월

골짜기 언덕에

한 무리 흰 꽃 피거든

헛꽃이라 생각 말고

이 땅에서 산화한

넋 꽃이라

불러주소.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