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연중 제11주일 2018년 6월 17일(나해)

모든 2 2018. 6. 17. 22:00

천안청당동성당(천안동부지구)

본당설립: 2014년.1.15. 주보성인:성가정

 

  + 마르코복음 4,26-34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처음에는 줄기가,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왔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말씀의 향기>

 

  작은 한 걸음  - 장동준 라파엘 천안성정도 주임-

 

  바오로 사도는 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6-9참조)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확신보다는 세상의 다른것들을 더욱더 신뢰하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주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쓰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세상일에 마음을 두면서 애를 쓰고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다양한 흔들림과 혼란스러움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곳은 바로'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고 희망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의 기쁨과 충만함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작음'이었습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그 어떤 씨앗 중에서도 작은 씨앗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뿌려질 때는 작은 씨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이 작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음은 우리 삶을 채우고 있는 우리의 욕심과 집착,거짓과 위선,미움과 증오,불신과 불목,분열과 차별을 비우고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깃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가지를 뻗으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깃들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찾아오게 하고 앉아 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고통과 시련,아픔과 상처,좌절과 절망으로 삶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그 그늘에서 삶의 용기와 희망을 찾으며 깃들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몇 해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청소년들을 격려하면서 '여러분은 혁명가로서 이 시대의 시류를 거스르는 용기를 갖고,용감한 모험가로서 사랑에 대한 교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을 발견하십시오.'라는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는 그저 작은 한 걸음을 내딛으면 됩니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쓰는 것도,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길도 그저 작은 우리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via의 시선(함깨 삽시다.)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저울에 올라가 몸무게를 잽니다. "어이쿠~~ 몸무게가 늘었네!" 얼굴에 인상을 쓰면서 내려오기도 하고,몸무게가 빠졌다고 기뻐하면서 활짝 웃기도 합니다. 적당한 몸무게가 궁금합니다. 적당한 몸무게와 세상이 요구하는 몸무게가 일치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성인 여성이 발달과정에 있는 중학생이 입어야 하는 정도의 옷을 입어야 하고,성인 남성이 모델들이 입는 옷을 입어야 하는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면 ... 정상이 아닙니다.

 

  때로는 저울 위에서 몸무게를 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집니다.

 

  "당신 존재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는지요?"

 

  육신의 무게에는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존재의 무게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육신의 무게와 존재의 무게가 반비례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무게가 커지면 존재의 무게가 작아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 존재의 무게를 두러내기 위해서 육신의 무게를 줄여나갑니다. 에스라인과 몸짱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육신의 무게를 줄여주는 약과 옷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알려줍니다. 구입해서 먹고 입지 않으면,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처럼..

 

  사람은 하느님 모상을 닮은 귀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숨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존재의 무게는 얼마나될까요? 창조주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존재가 사람입니다. 사람의 무게?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무게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무겁게 태어난 존재인지 성찰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볍다고 생각되는 피조물에게도 존재의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생명을 지닌 피조물은 하느님 창조의 무게를 지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 무게를 가볍다 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볍다고 혹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존재의 무게가, 지금 여기에서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바탕이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현존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나와 함께,이 곳에서,나 이외의 다른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모두가 창조의 무게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창조의 무게를 지닌 채로 서로 사이에서 밥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창조성이 확대됩니다.

 

  육신의 무게를 잘 살펴야 합니다.그래서 자신의 창조성이 올바로 들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존재의 무게에 대한 의식입니다. 존재의 무게를 잃어버린 사회는 위험합니다. 페르소나 기반 사회,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용도에 따라서 쓰여지는 자원이 되고,사용 후 버려지는 폐기물이 됩니다.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너무 단순하면서 분명한 말입니다. 존재의 무게를 의식할 수 있게 하는 말입니다. *"Inter-be"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 'inter-'라는 접두사와 동사 'to be'를 연결해 'inter-be' '더불어 있다'

 

 

 

지금 어느 집에 살고 계십니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는 House이고 또 다른 하나는 Home입니다.

 

  House는 조소로 표시되는 집을 말하고,Home은 마음의 온도로 표시되는 집을 의미합니다.

 

  몸만 들어가면 그 집이 House이고, 마음까지 들어가면 그때 그 집은 Home이 됩니다.

 

  집에 갈 때 무거운 마음으로 단지 몇 동 몇 호의 건물을 향해 가는 느낌일 뿐이라면,

  그는 지금 House에 가는 중입니다.

 

  반면에 집이 가까워질수록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면,

 

  그때 그는 Home을 향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우리 각자는 매일 저녁 어떤 집으로 가는 중일까요? House일까요, 아니면 Home일까요?

 

  한 지붕 아래 한 가족이라도,가족 구성원 모두 같은 집에 와 있는 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빠 엄마에겐 Home이지만,아이들에겐 House라면 그 집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집 안에 함께 있으면서 아이에게 밥 먹으라고 엄마가 문자를 보내는 일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 채의 Home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House 한 채가 들어서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집이나 건물이 낡으면 리모델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지게 집을 고쳐도 그 안에 가족들 모두의 마음이 들어와 살지 않으면 그 집은 결코 '홈 스위트 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교수-

 

 

 

어느날

작은 풀씨가 말했다

"여기에 다리 뻗어도 돼"

"깨졌는데 괜찮다면.."


얼마 후

 

베란다의 깨진 화분에는

노오란 괭이밥 꽃이

한 무더기 피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