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성당 첫영성체 기념 (1968년 4월 28일)
1939년 성황동에 설립된 '천안본당'은 1957년 천안역에 가까운 오룡동으로 자리를 옮겼고, 1982년부터 '천안 오룡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자료 제공 내포교회사연구소 (041)362-5028
+ 요한 복음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말씀의 향기>
배불리 먹이시는 주님 -김영삼 베드로 청양 주임-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게 되었는데,그들은 모두들 무엇인가에 목마른 이들,베고픈 이들이었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이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바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필립보의 대답은 사람 수와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계산하여 이백 데나리온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빵을 구하기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인데,필립보는 인간적인 셈을 한 것입니다. 인간의 셈을 넘어서시어 차고 넘치게 거저 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예수님 당신 자신임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을 필립보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중들은 모두 자리잡고 앉게 됩니다. 이들의 행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그들의 행위 안에서 그들은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자리잡는다는 것! 이제 피서철이라 피서지에 가면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경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먼저 자리를 차지해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고,늦게 오면 자리가 없어서 주변을 한참 서성거려야 할 것도 있습니다.
더위를 피해 좋은 자리를 잡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주님께로 향해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주님께서 알려주신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그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은 자리에 앉아서 아주 편하고 재밌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자리에 살고 있음에 감사드리고,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게 되면 큰 은총을 받게 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우리가 청한 것보다 더 풍성히 당신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성체성사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 - P.레메셰기 신부-
[문]보편적인 하느님 현존과 성체성사 안의 그리스도 현존의 차이는 무엇이며,감실 앞에서의 기도가 다른 곳에서 하는 기도보다 더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답]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참 하느님이고 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죽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자기를 비워 봉헌하신 빠스카의 어린양으로서 길가는 나그네 모습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를 양육하시고, 우리와 하나되신 다음 우리와 함께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성체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의 응답인 '예'(Yes)이며,성부께 대한 예수님의 '예'이다. 또한 예수님의 '예'에 대한 우리의 참여이기도 하다. 예수님과함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크나큰 원동력은 바로 성체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원동력은 미사때에 가장 잘 작용한다.
성당 감실 안에 봉안된 성체를 조배할 때 단지 예수님께서 거기 계신다고 보는 것만이 아니라,성부께로 나아가는 길이요 우리의 음식인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동력(動力)에로 초대하시면서 거기에 계신다고 본다면 성체 대전(臺前)의 기도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리이며 길이요 인간이신 예수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 외에도,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듯이,여러 가지 다른 현존이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교회안에,특별히 전례행사 안에,사제의 인격 속에 현존하신다. 당신의 말씀안에도,특별히 전례 행사 안에,사제의 인격 속에 현존하신다. 당신의 말씀안에도 현존하시고"(전례헌장7)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현존하신다. 이 모두가 '사실상의 현존'(praesentia realis)이다. 성체만이 예수님의 참다운 현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교황 바울로 6세의 'Mysterium fidei'(신앙의 신비)회칙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성체의 결과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 내 안에 살아계시는 것이다. 영성체 후 예수님이 내 안에 얼마동안이나 현존하시는가'라는 질문도 나옴직하다. 일반적으로 제병(祭餠)이 소화될 때까지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떤 수녀는 예수님이 자기 안에 오래계시도록 하려고 일부러 소화가 느린 큰 제병을 좋아한다. 이렇게 되면 우스꽝스럽게도 예수님의 현존이 소화능력에 달려있다는 말이 된다. 현대의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K.Rahner)는 성체를 목구멍으로 넘길 때까지라는 설을 내세우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현존이 식도(食道)를 통과하는 순간에 없어진다는 말이 되어 역시 우스운 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문제 제기(提起)부터 잘못된 것 같다. 예수님의 현존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삽니다."(6,5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영속적으로 머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성체 후에는 이미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서의 현존과는 다른 '사실상의 현존'이 계속된다.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지속시켜 주시는 성령의 연줄을 대죄(大罪)로써 단절하지 않는 한 주께서는 계속하여 우리 안에 사신다. 그래서 교황 바울로 6세께서도 성체 안의 예수님의 현존은 다른 여러 가지 현존의 원천이며 정점이라고 하셨다.
옛날 교리문답은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천국과 성체에만 계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릇된 표현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으시므로 당신이 계시고 싶은 곳에는 어디에나 계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내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성체는 그렇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여러 가지 현존의 보증이며 정점인 것이다. 성체 안의 현존을 다른 현존과 분리시켜 생각하게 되면 본 뜻을 알아듣기 어렵게 된다.
-신학전망(新學展望)1974년-중에서
나무는 공허하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된 상태를 원합니다. 안정된 직장,안정된 집,안정된 관계... 불안정한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안정됨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안정이 지속되면 마음은 평온한데 가슴의 두근거림은 자꾸만 희미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미에 눈길을 두기 시작합니다. 뭔가 살아있는 것 같은 팔딱거림을 느껴 보고 싶어 흥미로운 것들에 도전하게 됩니다.
재미를 느끼려면 약간의 불안정감이 필수입니다. 게임이 재밌는 것은 결코 승리의 과정이 만만하거나 편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바로 재미의 맹점이 됩니다. 재미만 유지하려다 보면 점점 피곤함을 느끼게 되고,결국 다시 최대한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그러다 그 안정된 상태가 지속되면 다시 재미로,재미가 되풀이되면 다시 안정된 상태로,다람쥐 쳇바퀴돌 듯 안정과 재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 굴레에 갇히면 진정한 성장이 멈추게 됩니다. 안정된 상태에서 최소한만 움직이고 있다면,혹은 여기 저기 재미만 따라다닌다면 우리는 결코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재미만으로 공허해지지 않고,안정감만으로 정체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나무가 그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저 높은 하늘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한 자리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나무,무더운 날 저도 나무처럼 조용히 한 자리에 앉아 주님을 향해 기도하는 일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느켜 보고 싶습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메마른 내 삶을
잠시 서서
그 서성임만큼
돌아다보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까닭이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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