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
오규원 시인의 소품에 가까운 시로 문학적 완성도 보다는 숨은 메시지가 눈에 뛴다. 의자에 머문 시인의 시선에서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이란 지혜를 발견한다. 쉽게 읽히다가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는 대목에 잠시 주춤해지는데 마지막 연과 연결시켜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선 어깨를 낮추고 얹힌 힘도 빼고 밑바닥도 챙겨보기를 권한다. 그러기 위해선 의자에 앉듯 무게의 중심과 균형을 잡으라는 얘기인 것 같다
역사관 역시 서거나 누워서(혹은 엎드려서) 볼게 아니라 차분히 앉아서 보라는 거다. 역사는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서 진술되어지고 기록으로 남겨졌으며 이설 없이 교육현장에서 통했다. 오백여년 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배웠지만 토착 인디언의 입장에서 콜럼버스는 침략자의 첫발일 뿐이다. 갑자기 바다 위로 솟구친 땅도 아니고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무인 대륙도 아니다.
이젠 우리도 서구 중심적 사고에 길들여진 역사 인식을 바꿔야할 때가 된 것 같다. 탈 서구적 시각인 인디오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관도 균형 있게 함께 다뤄져야 할 것이다. 과거 교육 현장에서 아프리카는 식인종이 득실거리고 북한 사람은 뿔이라도 달린 양 교육을 받았다. 아니지 않는가. 모두 왜곡되고 편향된 서구중심의 세계관과 지나치게 치우친 우측 이데올로기 탓이 아니었던가.
최근 또다시 교과서의 우편향 개편이 문제가 되었다. 과거 한차례 좌편향을 시도한 세력과 그 지지자들의 반발이 뒤따른 것은 예상된 결과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정파적 이익에 맞춰 교과서를 개편한다는 것은 실로 역사적 난센스다. 균형 있는 올바른 역사 기술이 그리 힘들고 양측의 논거를 다 담지도 못하겠다면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어깨에 힘이라도 빼야할 것 아닌가. 관계자들에게는 차분히 의자에 앉아 밑바닥을 보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한번쯤 되어보는 건 어떨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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