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팽이처럼 /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 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끓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 시집 <좀팽이처럼/1988년,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
이 시는 80년대 후반에 쓰진 것인데 그동안 통계상 수치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세계 인구는 50억이 아니라 67억이고요 서울은 특별시에 한정한다면 인구가 크게 늘지 않아 지금도 천만을 조금 웃도는 정도지만 외곽에서 서울로 오가는 수도권 사람들을 합하면 4백만은 더 보태야 할 수치입니다. 80년대 중반 우리의 경제 현실을 그린 이 시는 한창 군부독재가 무르익을 무렵 전아무개가 이 천억을 신나게 해먹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신촌 땅 부자의 위세도 대단하지만 사실 땅이라면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어디까지나 신촌보다는 강남이지요. 그 잘나가는 강남의 땅값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부자 동네인 이곳은 한번 입성하면 절대 나가려하지 않고 밖에서는 비집고 들어가려고 돈 싸들고 구름처럼 대기하고 있는 곳. 돈으로 도색한 그들만의 별종 문화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곳. 우리는 그곳을 서울시 '강남 특별구'라고 칭호하지요.
가만 되짚어 보면 해마다 혹은 해거름으로 불어 닥친 부동산 이상 열기의 중심지역. 버블이라 규정짓고서도 그 열병은 좀처럼 식지 않아 돈 놓고 돈 먹기와 강남불패의 '아파트 따먹기'전쟁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던 곳. 그런데 그들의 집값을 지키기 위해 사교육 시장을 유지하고, 입맛에 맞는 교육감을 뽑고, 아파트 값 떨어질까 우려해 주변에 있던 공업고등학교를 폐교시켜버리던 사람들이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직격탄을 정통으로 맞은 양상입니다.
집값은 더 떨어지고 급매물은 늘었어도 거래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바닥이라는 인식에 ‘윈도우 쇼핑’상태에 들었다곤 하지만 선뜻 매수세가 유입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튼 지금의 금융및 부동산 자산 가치 하락을 두고 돈 없고 땅 없는 일부 ‘좀팽이’들은 경상도말로 ‘꼬방시다’라고 합니다. 이럴 때 더 잃을 게 없는 절대적 약자의 빈정거림을 좀 새겨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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