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기다리며/ 정희성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이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이 나오고
50원을 뒤집으니 벼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 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이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먼지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 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집는다
-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비)’ 중에서 -
그 때 내 시선은 버스가 오기로 한 좌측 방향이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으며, 바닥에 묽은 침을 찍 뱉으면 바로 말라붙는 겨울이었다. 고이 오지 않는 버스를 책망하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바위처럼 웅크린 걸인이 있었고 그 앞에 알맞게 찌그러진 양재기가 놓여있었다. 꼭 동전 한 닢은 던져주어야 무슨 면죄부라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뒤졌다. 야속하게도 깊지 않은 주머니 속엔 10원짜리 네 개와 50원짜리 동전 한 개, 그리고 토큰 3개만이 딸랑거렸다. 다른 주머니와 지갑을 들여다봤지만 낮은 단위의 지폐는 한 장도 뵈지 않고 두어 장 배춧잎만 삐죽이 고개를 내밀 뿐이어서 솔직히 그걸 내놓기엔 스스로 가당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걸인이지만 액면가 백 원 이하의 동전 몇 개는 스스로 간지러워 그마저도 던지기를 포기하고 결국 외면해버렸다.
그날 만원 한 장이 훗날 얼마나 요긴하게 쓰였으며 배를 불렸을까? 알량한 핑계를 완성한 대가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기여치 못했을 뿐더러 삶의 질에 변화를 가져다줄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 때 나눔을 택했다면 삶이 조금이나마 성숙하였으리란 추정을 해보지만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이 다시 도래해도 쉽사리 쾌척이 힘든걸 보면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망상일 뿐이다.
남루와 궁핍은 비록 자기 상황이 아닌 그 배경만으로도 늘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사회적 비용이 지출됨도 물론이다. 나와 무관한 비용이 아니라 결국 내 몫의 물질적 정신적 비용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도 아무 하자가 없다는 생각은 자칫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가진 자는 더욱 겸손하고 덜 가진 자는 좀 더 당당해질 때 세상의 희망 그릇은 커진다. 세상엔 동전 따위는 돈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계급이 있다. 요즈음 더욱 가볍고 왜소해진 10원 짜리 동전을 보면 너무 앙증맞아 일없이 뒤집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세군 냄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추위가 사라진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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