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집 '성탄제(1969)'중에서 -
대구에 해맞이동산이라고 있다. 동촌 금호강이 내려다뵈는 야트막한 유원지 자연동산에 있는 소규모 공원이다. 한 때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터를 허물고 조성된 곳이라 각별한 정이 느껴지는 장소다. 지난 가을에 찾았을 때는 코스모스 군락이 장관이었는데, 사람의 발길이 많지않아 '대구 사람들이 아직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잘 모르나'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새해 첫날 첫 해를 맞기 위해 그 동산에 다시 올랐다. 오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유원지 입구에서 몇 걸음만 발길을 옮기면 되는 곳이다. 해가 뜨는 동쪽으로 향하는 언덕에 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매서운 날씨인데도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붉게 물들어가는 먼 둘레의 산에서 솟아오를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죽이 터지고 풍선이 날아오르자 환호와 함께 붉고 뜨거운 것이 약속대로 그러나 서두르지않고 불끈불끈 떠올랐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 손을 모으고 한가지씩 소망을 담아 새해를 맞는 각오와 다짐을 했다.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오는 것이지만 이 어찌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희망이라는 이름의 해를 같은 방향으로 함께 바라보며 긍정의 지혜를 찾아내는 것을 보면. 이렇게 선하고 슬기로운 눈으로 잇몸을 뚫고 나오듯 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겸손의 광채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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