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폭포에서/ 곽미영
월출산으로 간다
바람을 만나러 간다
이미 몇 해 전 부터
그를 가슴에 안고 살아온 그녀는
한번씩 그가 일렁일 때마다
몽유병처럼 일어나
그에게로 간다
숲이 품고있는 길은
대낮에도 어둡다
어둠을 밟고
바람에게 간다
당초 바람은
형상이 없다고 믿었던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어둠이 끝나고
빛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가 부챗살처럼 펼쳐놓은
바람이 쏟아져 내린다
- 시하늘 2008년 겨울호 -
‘정신이 막히면 속이 답답하고, 세상 구경하는 것이 협소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보지도 않고 세상에 대해 추측하지 말고 직접 보아야 안목이 넓어지는 데, 여행이 바로 그것을 이뤄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살았던 정란이란 선비가 자신의 여행이 갖는 의미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친구 신국빈은 이렇게 말하며 정란을 회유했다. ‘주자학은 학문의 근본을 정(靜)에 두었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직접 발로 밟지 말고 방안에 앉아서 침잠하여 성찰해도 그 비밀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천하를 여행하면서 온갖 변화를 목도하고 괴상한 구경거리를 하여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사악한 것에 물들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여행의 동(動)으로 인한 폐단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적어도 이때만 해도 아무런 구체적 목적 없이 그저 여행 자체를 즐기기 위해 전국을 누빈, 요즘으로 치면 전문여행가인 정란 보다는 신국빈의 말이 더 설득력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 곽미영 시인이 바로 정란과 거의 같은 수준의 여행가다. 지금은 여건만 따라주고 활동력만 받쳐준다면 여행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시인은 시를 쓰는 문학인에다가 매일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으며, 지아비와 자식이 있는 가정을 돌봐야 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매봉, 사자봉, 장군봉, 남근바위, 구멍바위, 탕건바위가 생 바람에 일렁인다 해도 그를 만나러 그 먼 곳까지 갈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게다. 더구나 일찍이 문인수 시인이 설파한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꼭 시를 쓰기 위해 자연을 찾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무엇이 그녀를 바람폭포 앞으로 이끌고 왔을까? 침봉들이 불꽃처럼 피어있는 모습을 올려 보면서 긴 햇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앞에서 막혔던 속이 다 터였음은 물론이다. 풍경의 발견, 바람폭포에서 그녀는 ‘바람은 형상이 없다고 믿었던’ 추정의 이미지를 지운다. 정란의 말처럼 직접 보지 않으면 ‘바람 폭포’는 그 고유명사만으로 한 편의 시가 완성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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