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2018년 5월 27일 (나해)

모든 2 2018. 5. 27. 22:30

 

황새바위 순교성지

박해시대 한국교회의 심장인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100년간의 한국 천주교 순교역사에서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며 고귀한 피를 흘렸던 거룩한 땅이다. 교회사료들과 관변기록 등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만도 337위이며,아직도 무명 순교자들의 이름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이들 중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103위 성인품에 올랐으며,이국승 바오로,김원중 스테파노가 124위 복자품에 올랐다.

 

  + 마태오 복음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세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향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오종진 베드로 청소년사목국장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청소년 주일인 오늘,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는 우리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게 만드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워주거나 굴레를 씌워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킬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어 누릴 수 있고,참된 "나"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냉철하게 살펴보면 우리 교회가 청소년들을 이 놀라운 은총의 길로 제대로 이끌어 가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들 역시도 교회 안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복음의 기쁨을 얻어 누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요즘 아이들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성당에 보내는 것을 그리 원치 않는다', '공부하느라 아이들이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이 모든 말들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을 탓하기만 하다 보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이 제시하신 참된 행복의 길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탓하기보다는 이 현실을 일단 우리의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이 현실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왜 교회를 멀리하는지,아이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우리 교회는 아이들의 현실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만나 주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초등부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니며 교회안에서 교육된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제공해 온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앙은 이론으로,머리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을 통해,또 삶의 모범을 통해 전해집니다. 청소년 주일인 오늘 내 안에 복음의 기쁨이 살아 있는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움켜쥘수록 공허해지는 헛된 행복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참된 기쁨과 희망을 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참된 어른,참된 삶의 스승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시면 좋겠습니다.

 

 

  via의 시선(생각)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편의점을 둘러 봅니다. 사실 특별하게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나오기 미안해서 껌을 샀습니다. 입이 텁텁하거나 식사 후 양치질이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라는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하면서,이 곳 편의점에는 몇개의 상품이 전시되어 있을까? 궁금합니다. 분명한 점은 상품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살까 선택하기 어려움을 느낍니다.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 어려운 이상함,다양한 소비욕구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 수만큼의 다양함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너무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닐까. 편의점을 나서면서 드는 저의 우문입니다.

 

  런닝머신을 사려고 상품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는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런닝머신은 조금 빨리 걷거나 달리기 위해서 도움을 받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제품이 다양합니다. 버튼을 누르면 오르막을 오르는 효과를 내는 기능이 발휘되고,손잡이를 잡으면 혈압이 정상인지 알려줍니다.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심장박동의 횟수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첨부되는 기능의 숫자 만큼 오르는 가격,한참을 살펴봅니다. 그러다 문득 산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에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건강하게 길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 사회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낳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승에 가본 적이 없으니 이 말을 굳이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싶은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할뿐입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길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욕구이지만 끝을 향하고 있는 존재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그래서 희망할 필요가 없는 것에 마음을 뺏길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건강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주장하는 최선의 선은 발전이라는 횃불 아래 계속되는 지속적인 생산입니다. 그래서 매일 수많은 신상들이 만들어지고,선전되며,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실패자가 되는 사회이지요. "더 많이 더 많이!"가 삶의 구호가 된 사회,이런 사회에서 편한한 숨쉬기는 진짜로 더 많이 가진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

 

  쉼을 가장한 편리함으로 길들이는 사회,다양성의 이름으로 무한생산을 정당화하는 사회,저는 이런 사회가 두렵습니다. 아니 아무런 문제제기없이 이런 사회를 살아 가는 우리가 두렵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개똥밭에서 구를 때의 느낌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가는 길에 개똥이 있으면 피하거나 그곳에 있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지나는 누구라도 쉬고 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아! 개똥을 묻은 곳에 수박씨를 심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당하게 내 탓

 

 

 운동경기를 보다가 결정적인 승패의 순간이 찾아오면 그때마다 자리를 뜨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 그의 행동이 궁금해서 한 친구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볼 때마다 이상하게 꼭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더라고.. 내가 안 봐야 이긴다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친구가 웃으며 놀립니다.


  "네가 그렇게 승패에 영향을 줄 정도의 초능력자인 줄 몰랐어!!!"


  그 친구도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왜 지게 되면 자신의 탓도 아닌데 스스로 그 결과에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 하는 걸까요?


  이기는 순간의 기쁨보다 지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려움이 과도해지면 자책감이 유발되고,그것이 반복되면 우리는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듭니다.


  수많은 승부를 펼쳐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길 때도 있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승부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몇 번 패배를 경험하면 본의 아니게 모든 걸 '내 탓'이라고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질 때마다 그게 모두 내 탓이라며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린다면 그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내 탓이오"는 패했을 때 나오는 우울한 탄식이 아니라,패배로 인해 얻게 된 겸손을 기쁘게 인정하는 탄성입니다.


  미사 때마다 주님 앞에서 내 탓이라며 가슴을 두드리는 건 내가 작아졌음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내가 이제부터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알리는 당당하고 용감한 고백은 아닐까요?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땅에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참 행복합니다.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