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2018년 5월13일(나해)

모든 2 2018. 5. 13. 22:30

  

홍주 성지

홍주 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있고,아직 알려지지 않은 분까지 포함한다면,1,000여 명이 넘게 이 곳에서 순교하였다. 내포 지역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홍성읍 한복판에 자리한 홍주읍성은 그 전체가 순교의 현장이었다. 홍주 지역의 순교자로 복자 원시장(베드로),복자 방(프란치스코),복자 박취득(라우렌시오),복자 황일광(시몬)은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  마르코 복음 16,15-2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말씀의 향기>

 

  지구가 돈다고?  -한광석 마리요셉 교구장 비서실장 겸 홍보국장

 

  인공지능지대에 사는 우리는 지구가 태양주위를 도는 현상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지구가 돈다면 어지러울 텐데 그게 말이 되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정된 지구를 중심으로 설명하던 하느님,우주,인간이해를 통째로 뒤집어야 했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행성의 하나에 불과하다면,창세기의 창조와 하느님의 이해에도 여러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 삶의 의미를 세우는 기본틀이 되는지 질문해 봅시다. 부활과 승천은 지구가 돈다는 주장보다도 엄청난 일입니다. 특히,예수님 승천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온 존재이기에 돌아갈 고향도 하늘임을 알려줍니다. 때문에 마치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지금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성공여부가 하느님 축복의 전부로 여기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내 기도가 이 세상의 행복에만 국한되어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봅시다.

 

  한편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이 오르신 하늘은 어느 방향이나 장소가 아니라,시공을 초월한 진리를 말합니다. 곧 예수님 승천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언제,어디든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든 언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그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기준도 현세 중심,나 중심에서 하늘 중심,하느님 중심으로 바뀌는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결국 돌아갈 곳은 하늘 고향이고,우리는 우주의 빛나는 별이 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예수님의 당부를 살아갑시다. 자동차 회사 '포드'의 창업주인 헨리 포도가 어느 날 다른 회사차를 타고 출근했다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직원들의 뒷담화에 "당신들은 아무도 나에게 포드차를 사라고 하지 않았지만,저 경쟁사 직원들은 매일 자기네 차를 사라고 권했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나누고 전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예수님 신앙을 감사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소중한 보물을 이웃에게 권해본 적이 있는지 질문하는 오늘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via의 시선(포장된 공간)  -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도로에 놓여 있는 '돌'을 보았습니다. 귀한 돌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반듯하게 뻗어있는 도로와 일자로 서 있는 회색빛 건물들입니다. 모두 시멘트로 치장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땅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 갑자기 나타난 돌,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러고 보면 시골에서도 돌을 잘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올 해의 땅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 땅을 갈아 엎고 다듬어야 볼 수 있었습니다. 아! 산을 오를 때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냇가를 산책할 때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가는 곳 어디에서나 네모 반듯하게 조성된 공간 안에서는 돌을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돌을 보려면 삶의 자리를 벗어나야 했습니다.

 

  도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저는 도시를 '포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곤 합니다.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공간,잘 포장해서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러나 실제는 존재하는 대상 모두를 유혹하는 공간이 도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를 '포장된 공간'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포장된 공간인 도시에서 만나는 것의 대부분은 실제의 것이 아닙니다.

 

포장된 도시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것은 포장된 것들입니다. 원래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서 눈에 띄는 문구와 화려한 옷을 입히고,원래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순수한 척 커버링을 합니다. 포장된 도시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반대합니다. 다듬어 지지 않은 돌이 밖으로 나와서는 안됩니다.

 

  보이지 않으면 잊혀집니다. 그런데 아쉽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원래의 것이 아니라 가공되고 감춰진 것의 일부라면,내가 만나고 알게 된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니라면,어쩌면 잊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로 위에 놓인 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났던 그들은 원래의 그들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서 원래의 나를 보았을까? 원래의 그들을 보았다면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저를 기억하겠지요.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원래의 나를 만나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포장된 내가 원래의 나보다 더 중요한 내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등을 내어 주신 분들

 

  잘 알고 지내는 수녀님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직접 그리신 그림 한 점이었는데 작은 액자에 손수 담아 주셨습니다.

 

  그림에는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한복차림의 단아한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등에 얼굴을 대고 너무도 편안하게 잠들어 있어 정말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수녀님께서는 그림을 주시며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성모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 모습이에요."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업고 계신 모습을 상상하며 그리신 그림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비록 아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그 그림은 저를 그 아기의 상태로 돌려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엄마의 등에 업혀 잠들었을 때 저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떠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곳곳에 여러 모습으로 살아계신 것처럼,성모님 또한 여러 모습으로 우리에게 포근한 평화를 주고 계시다는 생각 말입니다.

 

  성모님 앞에서 기도를 드릴 때,이제 언제라도 기꺼이 자신의 등을 내어 주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그 고마운 분들이 모두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수녀님께서 주신 그림을 보고 또 보며 성모성월인 5월을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게 보내고 싶습니다. 얼굴 하나 기댈 수 있는 작은 공간 안에 깃든 성모님의 충만한 사랑에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꽃비 내리던 날

어깨 위로

내려 앉은 꽃잎 하나

 

꽃잎인 줄 알았더니

나비였구나.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