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동 성당 주보 읽기/2018년 주보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2018년 4월 29일(나해)

모든 2 2018. 5. 4. 16:28

 삽티 성지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면계를 이루는 '삽고개(삽티)'에서 부터 남쪽으로 길게 흘러내린 계곡에 신자들이 숨어 살게 되어 그곳을 '삽티 교우촌'이라 한다. 이곳에서 황석두(루카)성인의 양자 황천일(요한)과 성인의 조카 황기원(안드레아)이 병인박해시까지 살았고,갈매못에서 처형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삽티에 안장하였는데,이일로 서울에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황석두 성인의 유해 안장지로의 의의와 그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배출한 '삽티 교우촌'은 한국천주교회의 주요한 순례지로 조성해야 할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문의:(041)836-9625

 

  + 요한 복음 15,1-8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은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말씀의 향기>

 

  람페두사(Lampedusa)  -이진욱 미카엘 대전이주사목 전담-

 

  이탈리아 최남단에 람페두사(Lampedusa)라 불리는,제주도의 1/10만한 크기의 작은 섬이 있습니다. 대륙에 더 가까운 이 작은 섬은 2011년부터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난민들이 고국을 떠나면서 유럽으로 가기 위한 기착지로 선택했던 섬이었기 때문입니다. 20만명 이상의 난민이 120km거리의 지중해를 건너 이 섬에 안착하려다 많은 수가 바다에서 죽게 됩니다.

  "내 사람 당신을 생각해,고국에서 난 너무 멀리 떠났어, 내 사랑 당신을 위해 떠나지,어머니와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거긴 환영의 땅,곧 입구에 들어서게 될 거야,저기가 바로 유럽,하지만 암초의 바다에서,슬픔의 달 아래서,우리는 고통을 겪지,우리의 조상들과 어머님께 말해줘요,람페두사에 도착하면 나아질 거라고,내 사랑 당신을 생각해요,당신은 무얼하고 있나요,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곧 좋아질 거에요. 날씨는 좋지 않지만,바람이 우리를 할퀴고 지나가지만,저는 곧 도착할 거에요. 신이시여 신이시여,이곳을 너무나 꿈꿔왔어요, 당신과 나를 위해 떠났어요. 신이시여 신이시여,저 자신에 대해 꿈꿔 왔어요, 어머님께는 말하지 마세요, 전 람페두사 한복판에서 가라앉고 있어요. 내 사랑이여 당신을 생각해요,이 생각이 마지막이 될 거에요."

  희망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끝나는 이 노래(Lampedusa)는 '크리스토프 마에'라는 프랑스 가수가 난민을 따뜻이 맞아 준 섬을 기억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하지만 섬은 그들을 환영하며 맞아 주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이라며 종교는 그들을 거부했고,너희는 골칫거리들이라며 정치가 그들을 거부했으며,너희는 내 것을 빼앗아 갈 존재들이라며 우리 안에 있던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홀로 람페두사 섬을 만드신 주님만이 그들을 환대했던 것이죠.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웰빙 문화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른 이들의 울부짖음에 무감각하게 만들죠. 실상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우는 울음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입니다. 누가 이 형제 자매들의 죽음에 대해 울었습니까? 누가 이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울었습니까? 아기를 데려오려는 젊은 엄마를 위해,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가장을 위해 누가 울었습니까? 아버지! 당신께 우리들의 불의에 대한 타협과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편협함,그리고 무관심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미사 강론(2013년 7월 8일 람페두사섬 이민자 수용소에서)

  교황 직무를 시작한 첫해부터 이민과 난민의 비참한 상황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던 교황님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온 교회에게 동참을 호소하십니다. 이 상황은 교회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시대의 징표'라고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via의 시선(뛰기 보다는 걷기)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월요일,아침 6시 미사를 봉헌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오늘을 지낼 방법을 찾습니다. 비가 내리는 아침,밀렸던 잠을 자기로 결정합니다. 빗소리가 듣고 싶어서 창문을 조금 열였습니다. 그런데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 만들어 내는 마찰음에 귀에 거슬립니다. 결국 선잠을 자다가 불끈 일어났습니다.

 

  성북동 자연휴양림,비는 더욱 세차게 내립니다. 마치 장맛비 같습니다. 그런데 좋습니다. 덕분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텅 빈 공간을 나무와 풀 그리고 꽃과 바위,그들의 몸을 적시고 있는 비와 사람인 내가 채우고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몸과 마음의 경직을 풀어줍니다. 책을 읽습니다. '퉁퉁',차량 지붕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리는 비의 크고 작음에 반응하는 나무가지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자연이 작곡한 노래와 춤에 취했습니다.

 

  백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전력을 다해서 뜁니다. 마침 선이 보입니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마침선을 지난 그 자리에 다시 출발선이 세워져 있고, 바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립니다. 쉴 줄 알았는데 다시 이어지는 백미터 달리기가.계속 반복됩니다. 마침선을 지나자 마자 다시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매순간 전력을 다해서 뜁니다. 헉헉거리며 뛰고 또 뜁니다.

 

  쉴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헉헉거리며 뛰다가 가끔 걷고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누워있습니다. 헉헉거리며 뛰고 있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듯이 박수를 치기도 하고,저 사람들의 게으름에 손가락질을 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자신보다 뒤쳐진 사람들,걷고 누워 있는 사람들보다 풍요롭고 행복해야 합니다. 경험하는 삶의 깊이가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그리고 달렸는데,똑바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헉헉거리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뛰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뛰어야 하는지 아니 뛰고 있을 것인지...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불편하게 살면 안되는 것일까. 좀 더 가난하게 살면 어떨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성찰의 주제입니다. 뛰다가 죽고 싶지 않습니다. 때론 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뛰기 보다는 자주 걷고 누워있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게 있어서 행복과 풍요는,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오늘되소서.

 

 

 

주님의 식탁에 초대 받으려면

 

 

  음식에 관해 저는 입이 짧은 편입니다. 가리는 음식도 꽤 되고 아예 입에 대보지 않은 음식도 많습니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나 도전하려는 용기 또한 부족한 편입니다.

 

  이런 저를 보고 지인들은 세상의 즐거움의 반을 모르고 사는 거라며 안타까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식습관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모임을 뷔페식당에서 갖게 되면 늘 투덜대곤 합니다. 차려진 음식은 많은데 마땅히 먹을 것이 없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막상 뷔페식당을 나설 때면 다양하게 음식을 즐긴 사람의 배보다 제 배가 더 불룩하게 나와 있을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먹을 게 없다던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 과식할 이유가 없으니 배가 홀쭉해야 하는데,어째서 식당을 나서며 오늘 저녁도 과식했다고 투덜거리는 걸까요?

 

  몇 가지 음식만으로 배를 채우려니 당연히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여려 음식을 조금씩 먹는 일이 오히려 과식을 피하는 방법인 줄 미처 몰랐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거대한 뷔페식당과도 같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맛을 내는 일들이 우리 앞에 매일 차려집니다. 그런데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취하려 한다면 결국 편견과 아집의 과식만 초래될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아간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기쁨과 슬픔,고통과 환희,희망과 절망을 골고루 받아들이는 사람을 위해 오늘도 행복의 식탁을 마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 교수

 

 

 

오늘 산

내 무게만큼 다가가

기도합니다.

 

마음과 행동과 실천이

나란하기를.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