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성지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82년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신자들을 묶어 물속 둠벙에 빠뜨려 생매장을 시켰던 진둠벙과 해미천 옆에 생매장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무명순교자의 묘,유해발굴지에 조성된 노천성당,서문 밖 순교지에 있던 자리개돌 원석이 보존되어 있다. 문의:(041)688-3183사무실
+ 요한 복음.10,11-18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은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말씀의 향기>
이 좋은 것을 어찌 혼자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이의현 베드로 성소국장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각자의 소중한 성소를 묵상하고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갈지 다짐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사제와 수도자,선교사를 위해 그리고 이 성소가 증진되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선 우리 각자의 거룩한 부르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두는 한 집안의 남편과 아내,아들과 딸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책에 따라 역할이 있습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로 회장,구역장,반장,단장,총무,회계 또는 직책은 없지만 봉사자로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래서 각자 다르지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 다른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하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직분은 서로 다르지만 한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인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다함께 하느님의 자녀답게,한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다음으로 사제와 수도자,선교사 성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최근 이 특별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들이 급감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8학년도 대전교구 신학교 입학생은 단 세명에 불과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에 대한 원인이 우리의 신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구절벽 현상,젊은 인구의 감소와 출산율 저하,늦은 결혼 또는 결혼의 포기 등 대 사회적인 요인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참맛을 알고 하느님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깊게 체험한다면,마치 우리가 멀리 있어도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는 것처럼,작은 텃밭이라도 성소는 발견되고 늘어날 수 있습니다.
가치의 1순위를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관심과 꿈은 달라집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그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신앙으로 나를 이끌고 우리 자녀들을 이끌도록 합시다. 많은 예비 성소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이 길을 걸으려는 이유는 하느님 사랑의 참맛을 알았고 그래서 영혼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이 좋은 것을 어찌 혼자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한 진정한 행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더욱더 신앙으로 이끌도록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특별하고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소자들은 자연스레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더 많은 성소자들을 허락하소서."
via의 시선 (4월을 지내며)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주간의 글-
4월입니다. 누군가는 '잎새달'이라고 말합니다.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달', 그런데 제가 경험하는 4월은 좀 이상합니다. 4월은 아픔과 고통의 기억을 품고 살아야 하는 달이면서,창조된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바리바리 짐을 꾸리는 달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4월은 집에서 떠나고 싶은 달인것 같습니다.
갑천을 걸었습니다. 생명이 자신의 소리를 내어서 좋은 곳,그래서인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곳을 그냥 두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찾습니다. 그런데 쉽게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산을 깨고 개울을 매웁니다. 논과 밭 사이에 터잡고 살던 아름드리나무의 밑둥을 자르고 평평하게 만든 땅위에 시멘트를 붓습니다. 일정하게 구획을 나눠 회색빛의 길쭉한 집을 세우고 집과 집들 사이 사이에 도로를 만듭니다. 그리고 회색 빛의 건물에 페인트를 칠한 후 멋진 이름을 새깁니다. 더 놓게 그리고 더 편리하게 지은 집들,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편안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지은 집인데..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소위 친환경자재를 사용해서 집 내부를 꾸밉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면 삶의 활기를 주는 생명의 향기 대신 회색빛의 조형물과 비루한 인간세상에서 올라오는 미세먼지의 향을 느낍니다. 그래서일까요. 점점 산으로 들어갑니다. 강이나 천과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싶어합니다. 그곳에 집을 지으면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피톤치드를 발산하는 나무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아침을 알리는 새들과 짐승이라고 부르는 생명들의 재롱거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꺽이고 휘어진 골들 사이를 흐르는 물의 분투를 자신을 위한 합창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한 공간,이곳에서 살 수 이있는 자격을 얻는 우리만을 위한 자연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보편적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외부인의 침입을 막겠다고 높은 담을 쌓고 담 위에 깨진 맥주병을 꽂아 놓았던 어느 부자들의 집을 기억합니다. 그들과 나는 '우리'일까? 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잎새달을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을 돋우는 창조의 신비가 우리 모두에게도 경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정한 누구의 잎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잎이 돋우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한반도 곳곳에,남북 모두의 평화의 잎이 돋우는 마중물이 될 수 있는 잎새달이 될 수 있기를..
오늘 행복하소서.
완벽 '준비'주의자의 변명
매사에 일을 참 빈틈없이 한다는 느낌을 주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평소 그분을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 전혀 완벽주의자가 아니에요."
"그래도 일하실 때 보면 정말 완벽해 보이는데.."
"그건 일을 준비하는 저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죠."
"완벽하게 일하는 것과 준비만 완벽하게 하는 건 다르단 뜻이죠."
그러면서 준비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바람에 정작 결과는 늘 어딘가 부족한 상태가 된다고 그분은 제게 푸념을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학창시절 시험 공부하다며 정작 공부에 완벽을 가하기보다. 공부하기 전 책상서랍 정리부터 하느라 늘 시간이 부족해 결국 벼락치기로 시험 준비를 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겠다며 정작 운동보다는 운동 장비를 알아보거나,운동에 대한 기초 지식을 검색하느라 지쳐 결국 운동은 다음으로 미루게 된 일도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준비가 늘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준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어쩌면 즉각적인 실천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냉담 중인 교우들에게 성당에 같이 가보자고 하면 가끔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돼서.." "조금 더 있다가 나갈 준비가 되면..."
준비에 완벽을 기하는 자보다,불완전하더라도 기도부터 하는 자를 주님이 더 사랑하시는 걸 우리는 가끔 잊고 사는가 봅니다.
-이충무 바오로/극작가,건양대학교교수-
가슴으로 내려와
앉은 자리에
한 송이 꽃은 피고
마음에서 잦아들던
시린 설움으로
그 열매를 맺더이다.
오늘 삶이
내일의 삶이
다 그러하듯이.
글.그림 이순구(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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