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항구의 거리/김미선
비갠 오후 통영 항구의 거리는
비린내 먼저 풍기고 흰 페인트가 눈부시다.
간물 씻어 내린 바다에 푸른 물결 넘실대면
한낮의 갈매기는 은빛날개 반짝이며
바다를 물고 허공에서 끼룩거린다.
비 그치고 물비린내 번지는 오후
설레는 가슴 사랑을 잠재울 수 없으리.
생생한 창밖 저 항구로 달려가
철썩거리며 밀려오는 물결 속
소용돌이 거쳐 구름다리 건너간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미륵산에 올라
홍백 깃발을 들고 망을 보다가
멸치 떼가 몰려오면
소리소리 치며 붉은 깃발을 흔들어
연안에서 먼 바다로 전파 선을 보낸다.
-시집 ‘섬으로 가는 길’ 중에서-
통영은 동양의 진주며 나폴리라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이탈리아에선 나폴리를 보기 전에는 사랑도 인생도 예술도 죽음조자도 논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도 따라 통영을 두고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망설여지지만 이 크지 않은 항구도시가 낳은 예술인들을 망라한다면 두어 번 정도는 고개를 끄덕여도 좋으리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 소설가 박경리, 화가 전혁림, 시조시인 김상옥 등 이들이 일궈놓은 예술혼의 흔적으로 지금 통영은 명실 공히 문화예술도시로 탈바꿈되었다.
김미선 시인 역시 이 곳 출신으로 누구보다 이 항구의 공기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 같다. 비갠 날 낡은 흰색 건물을 끼고 돌아가면 에스프레소 커피향이 아니라도 바다 비린내가 아로마 향기처럼 사랑을 촉진한다. 청마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시를 써서 비갠 오후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치듯 사랑을 봉인하지 못하고 구름다리 건너 미륵산으로 오른다. ‘망을 보다가 멸치 떼가 몰려오면’ 저 멀리 지중해에서 당도한 연인에게처럼 ‘소리소리 치며 붉은 깃발을 흔들어’ 사랑의 전파선을 띄운다. 팔닥팔닥 은빛 비늘 후리소리로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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