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낱말 새로 읽기8 -그냥/문무학

모든 2 2018. 5. 25. 21:29

 

낱말 새로 읽기8 -그냥/문무학

 

‘그냥’이란 말과 마냥

친해지고 싶다 나는

 

그냥그냥 자꾸 읊조리면

속된 것 다 빠져나가

 

얼마나 가벼워지느냐

그냥그냥

 

그냥.

 

- 현대시학 2007년 5월호 -

 

 

  이 시는 문무학 시인의 단시조 연작 가운데 한 작품이다. ‘낱말 새로 읽기’는 우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내뱉는 말들을 다시 건져내 닦고 기름 치고 조여서, 필요하다면 새로운 의미의 부여를 위해 리모델링 과정까지 거쳐 새로 내보내는 작업이다. 물론 문학인으로서 시도해볼만한 기발한 작품형식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글에 대한 가상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다. ‘땅과 하늘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그 사이/ 날 수 있는 것은/ 새뿐이지 않는가.’ 이 작품은 ‘새’에 대한 낱말 읽기다. 어찌 보면 언어유희로 비쳐질 수도 있겠으나 이 얼마나 대왕세종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언어의 잔치며, 의미의 재생산인가. 

 

 그냥이란 낱말의 쓰임새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그런 모양으로 줄곧.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이렇게 나온다. ‘그냥’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고 말이다. 아무런 생각이 개입되지 않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이란 관성이거나 길들여짐이다. 그래서 ‘그냥 전화했지’ ‘그냥 보고 싶어서’ 이런 말들을 자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냥 생각나고 보고픈 사람을 곁에 여럿 둔 사람은 아무래도 평소에 인간적이란 말을 자주 듣거나 실제로 인간적인 사람일 게다. 속된 것 다 빠져나간 채 서로 길들여진 관계일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이의 가벼운 말이다. 그런데 ‘그냥’ 전화해도 ‘그냥’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냥’ 그게 잘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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