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 시집 <겨울강> (세계사, 1994)
이것도 문학이고 시로 쳐주는가, 혹시 사이비 시인이 음담을 그대로 빼껴먹은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겠으나, 오탁번 시인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원로 시인이시며, 이 시로 2002년 미당 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었다. 그리고 오탁번은 소설가로도 알려진 참 대단한 입담을 가진 분이다. 얼른 들으면 얼굴이 화끈거릴 파격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엮어낼 수 있는 걸 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구석지고 축축한 곳에서나 벌어지는 눅눅한 이야기라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현실에서도 이같은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지어미가 병석에 누운 지아비의 약값을 위해 '굴비'보다 더 짭조롬한 눈믈을 파는 여인도 보았다. '굴비'는 어디선가 한번 들었지 싶은 음담패설 즉 지어낸 와이담이 맞다. 그러나 음담에 묻어 있는 삶의 곡진함까지 한눈에 통찰하고 변주해내는 미덕이 있기 때문에 시가 되는 것이다.
앞뒤만 분별할 줄 아는 여인네의 지아비에 대한 사랑과 그 마음에 목이 메고 마는 사내의 이야기는 짓궂은 웃음으로 가득 찬 음담임에도 전혀 엉뚱한 활기를 불어넣어 해학을 넘어선다. 아내가 굴비를 구해 온 내력을 알고도 굴비를 맛있게 먹고 그저 불퉁하게 볼멘소리 한마디 던지는 사내. 그리고 며칠 후 굴비가 다시 밥상에 올랐을 때는 결국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는 사내.
사랑의 해탈이다. 가난한 살림에 사내와 계집의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참으로 진실하고 갸륵하다. 그 갸륵함에 개똥벌레, 베짱이, 소쩍새 등 온 자연이 그들의 수수방아 찧기와 함께 호흡하며 장단을 맞춘다. 우주의 합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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