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에스컬레이터/ 최승호

모든 2 2018. 5. 25. 21:21

 

에스컬레이터/ 최승호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부채가 큰 부자이거나

부채도 없이 가난한 사람이거나

천천히 혹은 빠르게 죽음에 인도되기까지

올라가고 또 내려오며

펼쳐지고 다시 접히는 계단들.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궁둥이가 큰 바지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밑에서 쳐다보거나

고개돌려 저 밑계단의 태아들을 굽어보거나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서두를게 하나도 없다 저승열차는

늦는 법이 없다, 막차가 없다.

 

-  시집 진흙소를 타고(민음사,1987)

 

 

 자갈이나 모래나 돌멩이나 물속에 가라앉는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평범하고 공평한 진실을 잊고 산다. 그 무게의 질량에 따라 조금 천천히 가라앉거나 순식간에 주저앉는 차이는 있겠으나 예외란 없다. 삶이란 그런 아득한 침몰을 향해 운행하는 에스컬레이터 위의 생에 불과하다. 그것은 일방적 방향만을 가지므로 결코 거스르거나 목적지를 변경할 수는 없다. 

 

 이것만 생각하면 삶이란 참으로 절망스럽다. 고독을 켜켜이 쌓아가다 단숨에 무너져 내리면 곧장 절망이다. 모든 게 의미를 잃고, 희망이란 낯선 언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때 나를 정지시키고자 하는 무의식의 의지가 발현된다. 사람의 정신은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지만 절망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키르케고르도 절대고독은 절망이고, 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절망하는 자는 어떤 대상에 대해 절망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며, 그래서 자신을 제거해 버리고자 한다.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하지만 사랑을 잃고, 환상은 깨어졌으며, 희망은 거덜나버려 내가 관계하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어도 서두를 건 없다.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뜀박질할 것까지야 없지 않는가. ‘인간은 죽음을 향해가는 똥자루에 불과하지만’ 어차피 ‘막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짜’로 얻어 탄 에스컬레이터에서 맹목의 욕망을 억누르며 가만 옆 사람의 손을 잡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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