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가을의 기도/김현승

모든 2 2018. 5. 25. 21:14

 

가을의 기도/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김현승 시초,1957>중에서 -

 

 

 가을이면 단풍과 열매와 낙엽이 떠오르듯 가을하면 단박에 생각나는 시가 바로 이 ‘가을의 기도’다. 기도의 분위기가 경건하고 겸허하며, 따라 기도하기에 좋게 문장의 틀과 운율도 갖고 있다.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깔고 살았던 시인의 모습과 생애가 진하게 환기된다. 영적 충일을 갈망하는 동시에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며 시인으로서의 소망도 함께 담고 있다.

 

  ‘호올로 있게 하소서’란 대목엔 자신을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까마귀)로 머물게 해 달라는 자아의 갈망이 엄숙하고도 비장하다. ‘까마귀는 모든 빛깔을 억누르는 검은 빛깔로 저 자신을 두르고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거친 소리로 울고 가는 광야의 시인이다’

 

 하지만 이 시를 애송하는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는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부분에 가장 많은 시선이 길게 머물렀을 것이다. 이 투명한 기도가 의미한 사랑이 세간의 살 부딪는 사랑이 아니면 어떠랴.

 

 이 가을, 오직 한 사람만을 택하여 통속한 사랑을 골짜기에 핀 백합처럼 이루어낼 수 있다면, 인생에서 그보다 더 깨끗한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보배로운 열매가 있겠나. 눈썹 휘날리며 질주할 ‘비옥한 시간’이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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