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윤주영
시에
등줄기 서늘한 바람도 없고
시름 깊은 삶도 없고
따뜻한 시선은 더더욱 없고
전신주에서 전신주까지 흐르는 전기도 없고
좌심방 우심실 뛰는 것도 없고
칼같이 이는 증오도 없고
아, 시의 늘어진 어깨
건조무미해져 간다.
- 시하늘 2003년 봄호 -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詩이며, 거짓말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이상은 김종해 시인이 2004년 시인협회장 재임시 발표한 ’시인선서‘ 일부)’고 했다.
윤주영은 꼭 이 모양으로 시를 쓰고 그 값어치의 시인으로 살기를 열망하다가 지난 9월 10일 세상을 떠난 비정규직 시인이다. 그의 집에 이제 그는 없다. 그가 분탕치고 놀았던 카페 ‘시하늘’에도 그는 이제 없다. 그러나 다시 저녁이 오면 반짝이는 불빛과 그의 아이들과 아내가 있을 것이다. 카페 ‘시하늘’은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막막한 허리 구부려 조등을 밝히고 푸른색의 봉분 하나 만들어둘 것이다.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지리라. ‘더는 권태기 없는 곳에서, 시간의 자궁으로 회귀하지 않아도 좋을 곳에서, 씨앗 움트고 그 움이 무성한 시의 나무로 자라는, 저 자연의 순환처럼 그대 몸 안에서 차별 없이 구현되기를, 오래도록 계절을 변절하는 시인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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