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무명 두 필 잠깨다/손정휴

모든 2 2018. 5. 19. 16:56

 

무명 두 필 잠깨다/손정휴

 

시집올 때 할머니가

혼수에 넣어준 무명 두 필

장롱 속 까맣게 잠자다

오늘에야 반갑게 찾아진다.

 

유행의 덧없는 흐름 속

가끔 손길 닿아도 몰랐던

목화 다래 순 같은 숨결이

물레 돌리던 할머니 손 맛 벤 무게로

이제야 저고리 섶에 지긋이 담겨오는데

 

뻐꾹새 소리로 익어가던 노을빛 같은 것

별빛 싣고 가던 여울 같은 것들이

씨줄 날줄로

지금 온 몸에서 잠깨어 저려오는데

무명치마에 목화꽃 피어놓던 

그때 할머니 미소가

오늘에사 환하다.

 

- 계간 대구문학 2008 가을호 -

 

 

 권정생 선생의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역사의 질곡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아온 어머니와 일곱 남매의 이야기다. 엄마의 무명저고리는 손수 물레를 짓고 베틀을 꽁꽁 짜서 지어 입은 옷이다. 이 저고리에는 자식들의 젖 냄새와 코 흘린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저고리 섶에선 웃음과 울음소리가 들린다. 앵두꽃, 살구꽃 향기가 어렸고, 물레 소리와 베틀 소리도 아련히 담겨있다. 

 

 시인의 할머니가 혼수로 넣어준 ‘무명 두 필’의 낡은 전통은 장롱 속에 잠든 채 맵시와 유행에 밀려 그 숨결을 건져낼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뒤늦게 저릿한 반가움으로 그 물건이 시인의 손길에 닿았다. 넉넉하고 품이 헐렁한 삶을 살만한 나이가 되어서일까?

 

 무명의 질박함과 소백색의 아름다움이 그저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무명 짜기는 거의 사라져 중요무형문화재로 명맥만 잇고 있다. 할머니의 ‘목화 다래 순 같은 숨결이’ 담긴 두 필의 무명이 ‘뻐꾹새 소리로 익어가던 노을빛’과 ‘별빛 싣고 가던 여울’의 씨줄 날줄로 교직되어 온 몸에 휘감기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무명저고리 고름에 묻힌 젖 냄새하며 콧물자국의 그리움까지 소실치 않은 끈끈한 힘으로 마음 속 눈동자가 초롱 했다. 이제야 환한 할머니의 미소가 제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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