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이하석
어둠 속 높이 선 이순신은 전신이 파랗다
온통 바다 아래 잠긴 듯하다
폐교 운동장 침범하는 학교 앞 새로 핀 유흥가 불빛 때문인가
어떤 밤엔 빨갛게 달라오를 때도 있다
운동장 안 넘보는 건 취한 불빛뿐만 아니다
누가 애완하다 버린 짐승들조차 동네 떠나지 않고
그의 어둠 뒤지며 노략질한다
밤의 폐교 안은 내란으로 내몰린 바다처럼 들떠 있다
아이들 소리 하나하나 풍선처럼 떠올라 사라진 하늘엔
별들만 왁자지껄하니, 은비늘 쌤통 뾰루지들 돋아 있다
- 이하석 시집 『것들 』,(문학과지성사) 중에서 -
학교가 문을 닫은 지 십여 년. 잡초에 묻힌 이순신장군과 측백나무 사이에 세워진 세종대왕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용도폐기 된 채 버릴 수 없는 마음만 뒤숭숭하게 놓여있다. 쓸쓸함이란 이런 것인가. 썩은 판자때기 같은 교적비에는 졸업생 이백 삼십 오명 허명으로 처박혀있다. 모두 떠나간 뒷모습 이런 것이 쓸쓸한 것이겠냐고.
저기 단란주점에서 단란하게 새어나온 불빛이나 보다 가라고, 방파제 앉아 쓸쓸히 바닷물 적시는 노을이나 보다 가라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낡은 풍금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면 공포영화의 괴담이나 떠올렸다 가라고. 측백나무 그늘 아래 땅따먹기 하던 악동들 왁자지껄한 소리 이명처럼 번졌다 사라진 하늘에 ‘은비늘 쌤통 뾰루지’로 돋아난 별빛이나 보고 가라고.
그나마 학교가 있어서 늙은이들만 모여 사는 귀신같은 동네가 재잘재잘 살만했었다는 분이할머니의 추억은 바람에 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처럼 가볍고도 무겁다. 버려진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은 잘게 허리 잘려나간 분필토막에게나 여쭈어 보라. 정부가 삼키고 정책이 핥이고 도시가 난도질해간 오늘날의 폐교는 화가들의 작업실로, 종교단체의 수련회장으로, 천연염색 작업장으로, 한 묶음에 백 원짜리 팽이버섯 공장으로 탈바꿈된 다행스런(?) 사례도 적지 않지만 아직 많은 폐교는 ‘내란’ 수준이다. 우리 정부의 수도권 중심 ‘실용’이 제대로(?) 작동되기만 하면 이 내란은 더 깊숙이 진전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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