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와시학사, 1992)’ 중에서 -
아직도 식당 같은데 가면 테이블 No.10을 십이라 하지 않고 열이라 호명한다. 물론 그것은 10월을 십월이라 않고 시월이라 부르는 것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시월, 시월 되뇌어보면 애잔한 시월애가 느껴진다. 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던가.
이 땅에 수많은 시인들이 가을을 살다갔고, 그들이 남긴 절창들은 가을이면 되살아난다. 이미 가고 없는 시인이거나 남아있는 시인 누구든 가을을 노래하지 않은 시인은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가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시 한 편으로 가을을 다 담아낼 수 없지만 빛나는 가을의 시어들이 있기에 가을은 더 아름답고 눈물 나는 계절이다. 아무거나 좋아하는 시 한 편 찾아내어 시인 비슷한 시선으로 가을을 바라보면 하늘은 더 푸르러 보이고 산은 훨씬 더 가까이서 속삭일 것이다.
더 잃을 게 없다는 인식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좀 그렇지만 꽤 괜찮은 위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란 시 구절에 쉬 고개 끄덕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도 그런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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