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 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창비시선 '당신은 누구십니까'중에서 -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은 비행기도 고속철도 축지법도 아닌 좋은 벗과의 동행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좋은 친구와 마시는 술이며, 그 때의 술은 장소나 주종에 관계없이 그윽하고 깊다. 자본을 신봉하며 도회에 사는 사람은 우선 세 부류의 친구, 즉 은행원, 법조인, 의사를 곁에 두라고 처세술에서는 조언하지만, 여행을 하거나 함께 술을 마실 때 유효한 벗은 무엇보다 말의 소통이 잘 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일단 지루하지 않고 술도 술술 잘 넘어가는 법이다. 그러자면 화제도 한두 영역에 갇혀서는 재미없고 경계와 문턱 없이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어야겠다.
게다가 감성 코드까지 맞으면 더 고맙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이견이 있을 때 상대의 생각을 꼭 내게 맞추려 고집하다보면 우정은 멀어지고 애정은 더 멀리 달아난다. ‘똘레랑스’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흔히 '그 친구 그런 점만 아니면 참 괜찮은 친군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고 그 단점은 대체로 장점과 같은 세포군 안에 존재하는 속성이므로 단점을 제거하면 장점마저 사라져 버린다. 어느 친구가 성격이 급한 면 때문에 문제가 있다면 그만큼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장점이 있기 마련이고, 성격이 느긋하면 사려 깊은 것이 장점이기 십상인데 장점만으로 조합된 인간을 기대하기란 하느님의 재림만큼이나 어렵기에 우리는 다만 반성하며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인디언 말로 친구인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업고 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강물이면서 높은 친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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