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엽서, 엽서/김경미

모든 2 2018. 5. 12. 11:00




엽서, 엽서/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년 혹은 이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대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 시집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중에서 -



 

 굵은 입술의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을 거라며 스물네 살에 비망록을 남긴 초감각파 시인 김경미. 사람의 인연이란 더구나 남녀 사이의 그것이란 참 오묘하고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날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게 될 수도,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할 수도, 그녀의 흘린 미소가 나를 향한 게 아닐 수도, 내가 베푼 친절이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수도, 그리고 그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이 내게는 영원일 수도, 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그녀에겐 긴 추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에겐 내가 친구라 해도 내게는 그 이상일 수도, 그녀가 나를 사랑이라 불렀어도 내 심장의 리듬이 쿵쾅거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 거다. 사랑이란 지독히 일방적일 수 있는 불공정거래이며, 그래서 더러 착각하고 우리는 자주 이기적이 된다. '나 몰래 나를 꺼내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첫사랑의 마지막 엽서가 대문 안쪽에서 나부끼던 날, 하롱하롱 꽃잎 졌던가, 낙엽 굴렀던가. 구월의 마지막 날이었던가.





'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악마/이수익  (0) 2018.05.12
아직과 이미 사이/ 박노해   (0) 2018.05.12
거미 / 이면우  (0) 2018.05.12
코스모스에 바침 / 홍수희  (0) 2018.05.12
열애 / 이수익   (0) 2018.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