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12월 / 황지우

모든 2 2018. 5. 12. 11:18



12월 /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家産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 시집『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미래사, 1991년)

 

 일상에서 느끼는 우리의 생각은 생활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겨울에 대한 감상도 빈부의 정도에 따라 제각각 제 느낌대로이다. 난방 잘된 포시라운 곳에서 할랑하게 일하며 많은 월급을 받거나 오히려 겨울에 노가 나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12월과 이를테면 추운 길거리에서 과일 리어카 행상을 하며 곱은 손으로 얼마 안 되는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서 꺼내 몇 번이고 세고 또 세는 사람이 느끼는 겨울 단상은 분명 다르다.

 

 이 겨울 행복에 겨울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이럴 때 자칫 도가 넘는 럭셔리풍의 겨울 찬가가 다른 등 굽은 이에게는 '악마의 트릴'로 들릴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챙긴 보너스를 안주머니에 넣고 스키장으로 바다 건너로 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2월에 상실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순수한 겨울의 서정을 느끼는 게 온당치 않다는 뜻이 아니라 타인의 정서까지 깨부숴가며 열 받게 하는 방자함은 적어도 피해야할 것이다.

 

 요즘 지난 정권의 친인척에게 집중된 시선과 함께 내년도 성장률이 2% 대에 머물 것이란 어두운 전망 등은 내년에도 박탈감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이월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럴 때 예년에 늘 그랬듯이 최상급 위스키가 동이 나고 명품 브랜드 매장은 고객들로 넘쳐나는 흥청망청은 아무리 내수 진작도 좋지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12월의 저녁거리를 걸으며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부화도 치민다. 그래도 관공서 앞 12월의 나무에는 희망의 메시지인지 현혹인지 모를 꼬마전구의 무리가 쉴 새 없이 반짝인다. 그리고 너무 눈이 부신 쇼 윈도우는 그냥 지나친다. 오늘은 12월 초하루, 내일도 12월, 동네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나 벗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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