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4월/ 이외수

모든 2 2018. 4. 13. 22:16




4월/ 이외수

 

4월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시를 쓸 수가 없다.

정치가들처럼 욕망 때문에 인생에 똥칠이나 하면서 살지 않으면 천만다행.

이미 젊은날 접질러진 내 날개는 하늘로 가서 구름으로 흐른다.

문을 열면 온 세상이 시로 가득하거늘.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해가 떠 있음을 알고

저녁에 잠들어 꿈속에 그대를 만나면 그뿐.


- 시집『그리움도 화석이 된다』(고려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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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생명을 길러주었다.” T. S Eliot황무지' 가운데 잘 알려진 부분이다. 4월하면 습관적으로 엘리엇의 시를 인용하며 억지로 그 잔인함에 꿰어 맞추려하지만 흔쾌히 동의하기엔 개운치 않았다. 완벽한 봄의 계절임에도 잿빛 운운하며 우울을 펌프질하는 게 마땅치 않았으나, 세월호와 제주 4.3, 4.19 그리고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을 떠올리면 그 생각에 꼬리를 내릴 도리밖에 없다. 사적으로는 2년 전 어머니가 이승을 떠난 달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4월에는 부끄러움 때문에 시를 쓸 수가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제주 역사상 최대 비극을 우리 세대엔 국정교과서가 떠먹여주는 간략한 역사로만 알고 이해했었다. 빨치산 토벌로 규정한 제주4.3의 실상은 무차별 대량 양민 학살사건이었다. 미군정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진압군은 제주도민 중 70%가 공산주의자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대량 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전한다. 그 결과 제주도민 12%가 실제로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 지경이니 줄초상을 당하지 않은 가족이 드물고 한 집 건너 한 집은 억울하게 학살된 희생자 가족이었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제주지역의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 사이에는 진저리쳐지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제주 4.3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함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불편한 역사라고 해서 그 아픔을 파묻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걸레로 오물 훔치듯 흔적을 닦아낼 수도 없다. 아직도 제주 4.3과 세월호 참사는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제주 4.3은 다각적인 조사에 의해 국가폭력의 산물임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또 다시 왜곡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세월호 역시 그 전과 후가 달라지리라고 설레발이 쳤지만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라지는 것이 더 나을 정치인과 달라질 의사가 전혀 없는 정당을 몰아내는 일이다.


  정말이지 정치가들처럼 욕망 때문에 인생에 똥칠이나 하면서 살지 않으면 천만다행인 세상이다. ‘이미 젊은 날 접질러진 내 날개도 하늘로 갔는지 어디 시궁창에 처박혔는지 알지 못한 채 습관처럼 생명만 유지하며 망각과 무지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4월은 차라리 가장 잔인한 달일 수 있겠다. 사람들은 싹을 틔울 아무른 채비도 마련하지 못했는데 자연은 재생을 강요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어서 피어나라 일어나라고 재촉한다. ‘문을 열면 온 세상이 시로 가득하거늘삶의 버거움으로 아직은 희망생명을 온전히 적지는 못하겠다. 인디언 달력에서 4월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라고 예찬하는데 좀 더 기다려봐야겠다. 이제 곧 또 다른 선택과 꽃을 피우기 위한 진통을 겪을 터이지만, 그때까진 고통의 옹이를 감싸 안고 있을 수밖에 없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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