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죽꽃이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冥府殿)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꽃이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꽃이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꽃이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 시집『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1985)
지금 남쪽에는 아래로부터 온갖 봄꽃들이 활짝 피면서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꽃이 피는 시기는 매년 조금씩 차이가 나고 지역에 따라서 다르지만 삼천리금수강산 꽃으로 물드는 건 시간문제다. 시인은 그 꽃의 이미지와 특성에 맞게 콕콕 찍어 대표성을 지닌 장소에서 다 피어나도록 했다. 남녘은 그렇게 피운 꽃들로 천지를 물들이는데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남녘에선 양지와 그늘 가리지 않고 계절에 맞춰 차례대로 피지만, 추운 개마고원 갑산에는 가을에 피는 메밀꽃이 여름에 피는 감자꽃과 동시에 핀다고 한다. 이런 식이니 언제 무슨 꽃이 피어날지 가늠하기 힘들다.
생존을 위해 두서없이 피는 메밀꽃과 감자꽃의 예화를 대중에게 처음 소개한 이는 안재홍이다. 민세 안재홍은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과 함께 ‘부르주아 민족주의 좌파’로 분류되던 인사다. 그는 이 현상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면서 사물과 현상을 입체적으로 보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형용모순 같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가장 극명하게 대립하고 충돌했던 시간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을 거치는 초기 국면이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1930년대 독일사회를 규정하면서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을 가리켜 한 말이다.
어제 평양 거리를 얼핏 보면서도 스쳤던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제의 잔재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운동장 전체조회 따위가 일부 중고교에서 버젓이 남아있는 현상 등이다.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있는 파벌 학벌 연줄 같은 비정상 비효율의 요인들이 아직도 판치고, 선거 때만 되면 기승하는 지역주의, 집단이기주의, 편 가르기 등 구태도 여전하다. 탈근대의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일부 유권자들 역시 왕조시대의 신민의식 그대로임을 본다. 일부 야당의 광역 단체장 공천 양상을 봐도 그렇고 우리 정치가 시간의 도정 위에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다양한 견해와 주장을 아우르는 국민통합의 리더십은 오간데 없고, 아직도 유교적 사고와 군사정권 문화 그리고 산업화 시대의 규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깊숙한 이면에 내재된 이러한 여러 모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성숙한 발전은 요원하리라. 결국 비동시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그 첫 과제가 우리 스스로 그 전근대성을 벗는 것이다. 어쩌다 한번 주어지는 참정권의 기회를 잘 활용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국민의 행복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생존과 안위에만 몰두하는 것은 신물 나는 구태이다.
꽃이 계절의 순서 없이 피고 지는 현상도 나쁜 신호이긴 하지만, 정치의 전근대성은 우리의 삶을 더욱 옥죄게 한다. 노상 자잘한 꼼수나 쓰고 말장난이나 일삼을 게 아니라 좀 대국적으로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자신들의 도생을 위해 남북관계가 일그러지고 문재인정부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좀스럽고 한심한 정파가 존재하는 한 통일대망의 길은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현실을 연민한다. 백두산천지에 무슨 꽃이 피는지 궁금하고, 영변 약산에 진달래꽃이 언제 피는지 모르겠으나, 어제 평양 거리에도 노란 개나리가 핀 것을 보았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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