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성묘(省墓)/ 고은

모든 2 2018. 4. 13. 22:18




성묘(省墓)/ 고은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 시집『문의 마을에 가서』(창작과 비평,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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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전 박근혜 대통령은 북경 칭화대 연설에서 남북 국민들이 자유롭게 왕복하는 새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동서독의 경우처럼 남북한 자유왕래가 실현된다면 통일은 명약관화한 기정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 정부는 별로 노력한 것도 없이 상황만 악화시키고 말로만 설레발이치고 말았다. 그에 비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문재인 정부는 평화통일의 꿈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서게 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평양에 도착한 공연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의 방북도 통일의 물꼬를 트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나아가 막혔던 금강산 길도 뚫고 관광구역 확대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서로 오가는 발길이 잦아지고 넓어진다면 새로운 한반도 지형 위에 튼튼한 통일의 가교는 놓이리라. 통치자의 격 떨어지는 실언이기도 했지만, 하루아침에 북한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 기대는 통일 대박은 위험천만하고 우리로서도 자칫 재앙일지 모른다. 상호신뢰를 쌓으며 관계개선이 우선되어야 점진적으로 곳곳에서의 길이 터일 것이다. 통일은 결국 어떤 사상이나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나 스포츠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이번에 공연될 노래 가운데 몇 곡은 북한 인민들도 줄줄 따라 부를 정도로 이미 우리의 대중문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지 않은가.


  이번 방문 예술단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는 가수는 추가로 합류한 강산에다. 그의 대표곡 라구요에는 남다른 개인사가 숨어있다. 충청도 출신인 어머니는 함경도로 시집을 가서 1949년 첫 아이를 출산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어머니는 남편과 생이별하고서 아이만 둘러업고 극적으로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까지 내려와 그곳에 정착했다. 함경도 북청 출신인 아버지 역시 전쟁 통에 처자식과 뿔뿔이 흩어진 뒤 거제에 둥지를 틀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같은 피란민 처지인 어머니와 새로 가정을 꾸렸고 거제에서 강산에와 그의 누나가 태어났다. 굴곡진 어머니의 삶은 곧 한국의 근현대사였고 그것을 곡으로 만들었다.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어머니 레파토리 그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니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어머니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 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북측 실무단은 강산에에게 '넌 할 수 있어''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 괜찮다고 했지만,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아바이 아바이 밥 잡쉈소 어 명태 명태...' 함경도 사투리가 나오는 곡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인 명태와 함께 라구요를 꼭 부르고 싶다고 했다.


  우리의 대중문화와 상품이 저들의 삶에 자리 잡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통일의 기운을 북돋우는 최적의 조짐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개방과 시장경제의 확대야말로 우리로선 가장 소망스러운 통일의 문고리가 아니랴.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재현되는 날이 바로 새로운 한반도의 지형이 형성되는 그날이 아닌가. ‘라구요가 저들의 새로운 유행가가 되고, 남북 물자교류가 활발해져 묘향산에서 직접 캔 노루궁뎅이버섯을 남한의 경동시장에 내다팔고, 남한의 전자제품 대리점이 북한 땅에 들어서 김치냉장고가 각 가정에 보급이 될 때 어느새 통일은 눈앞에 와있으리라. 시인의 아버지가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돌아가신 분단시대에 우리가 계승해야할 가치도 바로 그 소금과 같은 것이 아닐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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